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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 코끼리 만지기’ 편견 뒤집은 시각장애 소년의 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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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이야, 별세계다!’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20일 서울 성수동 갤러리아 포레 컨벤션 홀. 프리미엄급 아트 페어(미술 견본시장) ‘갤러리서울12’ 행사가 한창이었다. 위상에 걸맞게 참여한 갤러리며 전시작, 이를 평가하고 거래하기 위해 모인 이들의 차림새마저 예사롭지 않았다. 30초 만에 휘갈긴 스케치가 800만원을 호가하는 영국작가 데이미언 허스트, ‘사진철학자’라 불리는 한국의 세계적 작가 김아타. 특히 눈이 간 건 일본 다케다 화랑이 내놓은 팝 아티스트 나라 요시토모의 작품이었다. 머리에 뿔까지 난 밉살맞은 표정의 소녀. 한껏 위악을 떨고 있지만 결국 와 닿는 건 짙은 외로움.

 그렇게 두 시간 남짓, 눈이 호강했다는 기분으로 행사장을 빠져나가려다 그것을 봤다. 출구 앞 후미진 곳에 자리한 부조 하나. 제목이 이랬다. ‘코끼리를 만져 본 순서대로’. 작가는 ‘대전맹학교 초등 5학년 김우진’이었다. 맹학교? 5학년? 코끼리를 만졌다고?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부조는 코부터 꼬리까지, 코끼리 몸 구석구석을 만져본 시각장애 소년의 기억과 놀라움을 담고 있었다. 마침 관련 부스가 앞에 있었다. ‘우리들의 눈’. 시각장애인 아트 프로젝트라고 했다. 전시물 중엔 사진수업 결과물을 엮은 작품집도 있었다. 티칭 아티스트의 도움을 받아 시각장애아들이 직접 찍은 사진이었다. 몇 장 넘겨보다 울컥했다. 눈이 안 뵈는 그들은 소리로, 촉감으로, 냄새로, 뭣보다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새로 깎아 까칠한 짝꿍의 다정한 뒤통수, 후다닥 뛰어가는 친구의 발, 바람 따라 구르는 공원의 낙엽. 쏟아지는 물줄기를 근접촬영한 사진엔 이런 설명이 붙어 있었다. “작년 가을 엄마가 학교에 오셔서 설거지 봉사를 하신 적이 있는데, 그 후론 가을에 물소리를 들으면 엄마 생각이 나요.” 볼 수 없기에 더 많은 걸, 더 깊이, 더 큰 감동과 경이로움으로 보는 아이들.

 ‘장님 코끼리 만지기’는 우리들의 눈의 핵심 프로그램이다. 시각장애인을 폄하하는 우화, 이를 역으로 풀어보고자 시작한 작업이다. 아이들은 친절한 수의사와 조련사들의 도움을 받아 지구상 가장 거대한 동물을 만지고 느낀다. 그 경험을 담은 작품들은 눈이 뵈는 그 누구의 것보다 ‘코끼리스러움’의 본질을 드러낸다. 통찰력, 전복성, 심안(心眼)으로 본다는 것. 그야말로 예술이다.

 이번 전시 팸플릿 표지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지금은 침구사로 일하지만 맹학교 시절 받은 미술 수업은 나에게 인간으로서 품위 있게 사는 자존감을 심어주었다’. 어찌 그뿐일까, 대가들의 작품에선 느낄 수 없던 감동을 내게 주었다. 예술이란 결국 마음을 건드리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했다. 그 기쁨과 충만감을 오래 누리고 싶어 기꺼이 소액 후원회원이 됐다. 그럴 수 있어 감사했다.

이나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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