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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 칼럼

TV 시청료 갖고 장난치는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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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모두가 주인이면 아무도 주인이 아니기 십상이다. KBS 교향악단이 딱 그 꼴이다. 올해 예산 93억원. 국민이 세금처럼 내는 TV 수신료(시청료)에 기대고 있으니 교향악단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국민이다. 그러나 주인이 말을 삼가는 동안 악단 단원들과 지휘자, KBS 경영진이 혹은 주인 행세를 하고 혹은 나 몰라라 뒤로 빠져 있었다. 그 사이 오케스트라는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이래서 우는 애와 마름에게는 못 당한다고 했던가. 기껏해야 마름 아니면 주먹 센 종일 뿐인 사람들이 악단을 뒤흔들고 있다. 시청료의 무게와 의미는 눈곱만큼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연주회 취소는 오케스트라의 존재 부정이다. 그러나 지난달 8, 9일로 예정됐던 666회 정기연주회가 무산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이래 연주회 취소는 KBS 교향악단엔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지난달 29, 30일의 667회 정기연주회도 열리지 못했고 이달 26, 27일로 잡힌 668회 정기연주회도 기다려 보나 마나다. 외국인 연주자에게는 이미 올 필요가 없다고 통보했다는 소문이다. 그제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기로 했던 ‘2012 교향악 축제’ 연주도 결국은 ‘뻥이요’로 끝났다. 예술의전당 홈페이지에도 ‘KBS 교향악단 연주가 교향악단 사정에 의하여 취소되었습니다’는 공지가 떴다. 교향악 축제는 전국 22개 악단이 참여하는 큰 행사이고 KBS악단은 그 맏형 격이다. 과연 맏형 자격이 있는가.

 누가 KBS 교향악단을 망쳤을까. 부임 이래 단원들과 마찰을 빚어 온 함신익 상임지휘자부터 보자. 전문 지휘자의 시조로 꼽히는 한스 폰 뷰로는 “세상에 좋은 오케스트라, 나쁜 오케스트라 같은 것은 없다. 좋은 지휘자, 나쁜 지휘자가 있을 뿐이다”는 명언을 남겼다. 독설가로 유명했던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한발 더 나아가 “좋은 지휘자, 나쁜 지휘자라는 것은 없다. 나쁜 지휘자는 이미 지휘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비추면 함씨는 단원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나쁜 지휘자다.

 그러나 모든 게 지휘자 탓인가. 나는 일부 단원들의 잘못이 훨씬 크다고 본다. 전반적인 사정을 들어보면 함씨는 KBS 교향악단이라는 갈라파고스 군도에 어느 날 발을 잘못 들여놓은 외래종(種) 신세다. 연습에 전념하는 대신 오디션 거부, 과도한 외부 출강 같은 행동을 한 일부 단원은 함씨를 비난하기 전에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함씨는 “(단원들의 반발로) 아무런 권한도 행사할 수 없었다.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의 일부를 바꾸는 것조차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단원들 간 다툼이 담긴 녹음 파일을 들어보면 시정잡배 수준의 욕설로 도배돼 있다. 흥분한 상태였다는 변명에 앞서 험악한 분위기 조성에 자신들은 일조하지 않았는지 살펴야 하지 않을까.

 지휘자와 단원들 간 드잡이가 벌어지는데도 KBS 경영진은 거의 손을 쓰지 못했다. 평소 TV 수신료의 소중함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는 분들이다. 그런데도 연 100억원 가까운 수신료를 불과 92명의 지휘자·단원들이 허공에 뿌리거나 말거나 나 몰라라 하는 형국이다. 지난달 열린 KBS 이사회는 “전면 물갈이든 법인화든 교향악단을 쇄신할 방안을 내놓아라”고 경영진에게 촉구했다. 한 달 가까이 지난 오는 25일에 다시 정기이사회가 열린다. 그동안 KBS 경영진이 한 것이라고는 독립법인 설립, 전면 리모델링, 악단 해산 등 3가지 방안을 정리해 놓은 것뿐이다. 3가지는 진작에 다 거론된 구문(舊聞)에 불과한데 말이다. 게다가 교향악단 운영위원들마저 지난 18일 사퇴의사를 밝혔고, 단원들에게 내린 징계는 최종 확정이 미뤄지는 등 끝도 없는 우왕좌왕이다.

 김인규 사장과 이사회가 비상한 각오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 12월로 임기가 끝나는 함신익 지휘자는 본인은 억울하겠지만 퇴진이 기정사실화된 분위기다. 단원들도 내보낼 사람은 내보내고 판을 다시 짜야 한다. 그동안 함 지휘자와 각을 세웠던 최봉락 단원은 유력한 쇄신책으로 거론되는 법인설립안(서울시향 모델)에 대해 “아직 (악단) 내부에서 논의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악단이 소속된 KBS 제1노조가 다음 달 3일 파업할 예정이라 사태는 더 복잡해졌다. 김인규 사장은 임기가 11월까지다. 현 KBS 이사진도 8월 말 임기가 끝나며, 6월쯤 새 이사 선정 작업이 시작된다. 시간이 없다는 얘기다. 혹시 KBS 경영진은 악단을 바로잡는 일 자체가 어려워서라기보다 이대로 대선 후까지 뭉개고 가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그렇다면 정말 국민 돈인 시청료 갖고 장난치는 사람들과 한통속이라는 말을 들어 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