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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록 연재소설 - 붓다의 십자가 4.근심 없는 나무들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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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몹시 미워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쳐요. 그것만 사라져주면 천국이 될 거라고 믿죠. 정말 그것이 사라지면 천국이 될까요? 문제는 저마다 사라지기를 바라는 게 제각각이라는 거예요. 어쩌면 그 자신도 누군가에 의해 간절히 사라지기를 바라는 대상일 수 있겠죠.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그게 없다면 세상은 완전한 세상이 아니죠. 완전한 세상에서 그것 하나가 빠진 세상이 되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미워하는 것이 사라지기를 바라지 말고 아름답게 변하도록 도울 일이에요.

[일러스트=이용규]

“승정께서도 판각을 해보시려고요?”
김승이 물었다. 남해에서 일연과 함께 새기던 『반야심경』이 떠올랐다. 일연은 내가 관자재보살처럼 세상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 언제라도 달려가 도와주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판각사업이나 지휘하는 일개 승정에게 너무 큰 바램이었다.
“아뇨. 이처럼 지극정성으로 새기는 진리의 말씀이 우리 불가에만도 무려 팔만사천 장이 넘건만 세상은 왜 이리 생지옥일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나는 야단맞고 서있던 각수장이 연습생의 등을 두드려주며 복도로 나왔다. 내실 문을 딴 김승이 나를 안으로 이끌었다. 예수의 일대기 편액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봐도 강렬했다.

“말보다 실천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달라집니다.”

조각칼로 새기는 것처럼 카랑카랑한 어조로 김승이 말했다. 그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이 담긴 편액 앞에 섰다.

“김승 촌장님!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나는 더 이상 변죽을 울리고 싶지 않았다. 김승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를 이 마을로 불러들인 목적을 말씀하세요.”

내가 재차 채근했다.

“지밀 승정! 승정은 우리 마을에서 무엇을 보았나요?”

“나는 우선 암흑세계를 보았고 눈을 뜨고 나서부터는 온갖 무녀리들이 모여서 만들어가는 화평세계를 보았습니다.”

“그래요. 우리 마을은 사랑의 공동체지요. 누구든 우리 마을에 들어오면 화평을 얻게 되오. 도망쳐온 노비건 전쟁고아건 장애자건 귀화인이건 차별 없는 대우를 받고 한 형제자매가 되오. 풍요롭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배는 곯지 않지요. 딴 데 다 있는 보릿고개라는 게 없으니까요.”
듣고 보니 그것만으로도 김승은 훌륭한 촌장이었다. 이 전쟁 통에 이만하면 됐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런데 김승은 남다른 야심이 있다. 나는 세상을 바꾸려는 김승의 야심이 오히려 마을의 화평을 깰 수 있다고 보았다.

“촌장은 지금 행복한가요?”

이 판국에 왜 내 입에서 행복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불교는 인생이 본래부터 고해라는 인식한다. 따라서 그 고통의 본질적 요소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어버려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나는 김승이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끊었다고 보지 않는다. 살아있는 자는 욕망덩어리이고 성내고 어리석게 마련이다.
“내 소명, 세상을 구원하는 날이 오면 행복해지지 않겠소?”

역시 김승은 혁명가였다.

“무엇이 구원인데요?”

“여옥 여사제와 가온은 복음을 들으면 그게 곧 구원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개인적인 주님과 구원자로 인정하고 나아가서 정치적인 주님, 정치적인 구원자로까지 인정하면 그 순간 천국이 된다고 합니다. 나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지금 고려는 귀족화된 불교와 무인정권치하이며 정복전쟁으로 혈안이 돼 있는 몽골제국 천하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전해 들어도 무인정권치하와 몽골제국 천하를 벗어날 수 없지요.”

김승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현실적인 나라 사정을 무시하고 머나먼 천국을 말한다는 건 현실도피다. 갈릴리 목수 출신 예수도 지금 고려의 사정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세상을 살다 갔다. 로마제국의 식민지 천하에서 형식적인 율법에 얽매인 유태교는 생민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로마의 지배에 협력했다. 그래서 억압 받고 차별 받아온 하층민들이 결집하여 일어났다. 예수는 그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다.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는 물질화된 교회를 성토하고 반로마적인 메시아운동을 전개했다. 유태 지배층은 혹세무민과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예수를 체포하고 로마의 형법에 따라 십자가형에 처했다. 이로써 예수 운동이 진압됐으나 예수의 부활 신앙이 생겨났고 유태교와 다른 기독교가 성립되었다.

미완의 혁명가 예수는 혁명의 완성을 위해 재림(再臨)을 필요로 한다. 지금 고려의 남녘 땅, 서쪽에서 온 마을의 촌장 김승은 경교를 이용하여 정치혁명을 꿈꾼다. 고려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지만 반란하다 발각되면 삼족을 멸한다. 김승의 정치혁명이 성공하면 다행이겠으나 실패하면 몰살당하고 만다.

“난 두렵습니다. 고해의 바다 한 가운데서 어렵사리 만들어온 이 마을의 화평이 촌장의 야심 때문에 깨질까 봐요.”

“승정처럼 나약한 마음으로는 노예의 삶밖에 못사는 거요. 연못의 물고기, 하늘의 솔개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으면 싸워서 얻어내야 하는 거요. 자유를 옥죄는 사슬들을 끊어내야 한단 말씀이오. 우리는 승정의 도움이 필요하오.”

김승이 내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내 힘은 미약합니다.”

“아니오. 승정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소. 우선 이 주옥같은 성경들이 팔만대장경 목록에 들어가도록 힘써주시오. 승정이 수기 도승통을 설득시키면 가능할 것이오.”

김승이 경교문헌들과 복음서들을 가리켰다. 고려에 알려진 경교문헌들뿐만 아니라 대진국에서 들여온 성경까지도 팔만대장경 목록에 넣어달라는 주문이었다.

“예수 이야기는 놀라운 소식이긴 합니다만 불교 교리와는 너무 이질적입니다.”

동방과 서방의 두 종교, 불교와 경교를 비교분석한 내가 난색을 표했다.

“뭐가 이질적이라는 거요?”

“예수를 깨달은 자, 그래서 세존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신의 아들이며 부활 승천했다는 것, 그만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 등은 철저한 수행을 통해 해탈의 길을 얻는 불교와 너무 다르오. 타력 구원과 자력 구원의 문제니까요.”
나는 칼로 자르듯 선을 그었다.

“불가에서도 중생구제를 말하잖습니까? 내가 보기에는 별반 차이가 없어요. 가온의 어록을 정리하고 있는 탁연 스님을 만나보시오. 가온과 승정, 탁연 스님이 함께 정리하여 새로운 복음서로 묶어낸다면 불교 경전과 다름없는 내용이 될 겁니다. 그건 가온의 말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이라고 봅니다.”

가온의 범상치 않은 언행들을 잘 정리하여 복음서에 덧붙이면 울림이 큰 경전이 될 것 같다. 하지만 가온은 예수가 아니며 불교도도 아니다. 새로 집대성해 판각하는 팔만대장경 가운데 이 땅 스님들의 글이 들어가 있는 불전은 고작 83권이다. 수기 스승의 『교정별록』 30권과 『대장목록』 3권, 혜심대사의 『선문염송집』 30권, 균여대사의 『십귀장원통기』 2권, 『지귀장원통기』 2권, 『삼보장원통기』 2권, 『석화엄교분기통초』 10권, 장웅의 『보유목록』 1권 등이다. 그 유명한 원효 대사의 『대승기신론소』도 넣지 못했는데 예수의 행적을 담은 복음서와 가온의 이야기를 목록에 넣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유력한 불교 서적도 종파 간에 이견을 좁히지 못해서 못 넣은 게 많습니다. 하물며 이교도의 경전을 넣어달라니요.”

나는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아시다시피 모든 종교 경전은 문명교류의 흔적을 담고 있소이다. 천축국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노장사상과 만나 통섭하여 수많은 경전이 쏟아졌지요. 이 『미란타왕문경(彌蘭陀王問經)』 같은 경우는 북인도를 지배했던 그리스 왕 미란타(메난드로스의 음차)와 학승 나가세나가 벌였던 논변을 담고 있잖습니까? 그리스 철학과 불교 철학의 불꽃 튀는 만남의 결실이지요.”

김승은 서가의 수북한 두루마리 경전들 속에서 『미란타왕문경』을 골라내 보였다. 워낙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답게 미리 꺼내둔 듯했다. 나는 이 경전을 아주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난다. 미란타 왕은 현명한 호학 군주였다. 철학과 수학, 음악, 의학, 역사, 천문학, 논리학 등에 해박한 그와 대면하여 논변하기 전에 당대의 학승 나가세나는 전제 조건을 단다. 왕의 지위로서가 아니라 현자로서 대론하자는 거였다. 현자는 비판과 수정이 가능하지만 왕은 오직 자기 입맛에 맞는 내용만 들으려하고 어긋나면 처벌을 명령할 것이기 때문이다. 왕은 나가세나의 전제 조건을 받아들이고 모두 304가지의 질문을 던졌다. 그중 42가지 질문이 실전되고 262가지 문답이 전해오고 있었다. 영혼의 존재 여부를 묻는 미란타 왕에게 나가세나는 모든 법이 대상에 의해 마음이 움직여서 생기는 것이므로 영혼의 존재는 인정될 수 없다고 답한다. 집착하지 않으면 윤회의 근거가 사라지므로 영혼은 없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왜 불가에서 영가천도를 지내주며 돈벌이를 하는 것인가? 모순이다. 영혼이 없다면 천도재를 지내지 말아야 옳다. 중생들을 위로하는 방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비중이 크다. 나는 조금 전 옆방에서 가온과 대화하면서 우리 몸에 깃든 영혼의 존재를 인정했다. 떠도는 영혼들의 세계가 바로 중음계가 아니던가. 그런 현상은 인정하되 본질적으로는 공하므로 없다고 해야 제대로 된 불교 수행자다. 우리는 아무리 애써도 이 세상에서 자성을 가진 것을 찾을 수 없다. 찾지 못함, 이것이 절대 진리다. 그런데 나는 영혼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모순을 안고 나는 살아간다. 삶이 어디 논리던가. 우리네 삶 자체가 하나의 모순인지도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오? 『미란타왕문경』도 대장경 안에 포함됐는데 경교문헌과 복음서가 못 들어갈 이유가 없지 않느냐 말씀이오?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담아내야 비로소 완성도 높은 대장경이 되는 겁니다.”

김승이 내 사유를 끊어놓았다.

“나는 『미란타왕문경』이 그렇게 뛰어난 경전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예수 탄생 150년 전에 있었던 동방과 서방의 철학 논변치고 아주 뛰어나지요.”

김승의 공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깊었다. 탁연 같은 학승을 가까이한 덕분일 거였다.

“그리스는 유태와 마찬가지로 영혼을 인정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학문에 정통한 미란타 왕이 왜 나가세나의 무영혼설을 그처럼 쉽게 받아들였을까요? 자신의 세계관을 너무 쉽게 바꾸고 있단 말이지요. 나라면 끝까지 물고 늘어졌을 겁니다. 용수의 『중론』을 빼고 대개의 불경들은 논리가 취약합니다.”

나는 대장도감을 교감하는 승려로서 집요하게 허점을 파고들었다.

“지밀 승정의 치밀한 분석에 탄복합니다. 예수의 성령 잉태와 부활도 좀처럼 못 받아들이시겠구려.”

“재구성된 신화와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의 탄생과 승천 이야기와 거의 똑같거든요.”

“그럼 수기 도승통을 설득하여 목록에 넣어주시오. 예수는 서방에서 성불(成佛)한 또 한 분의 부처요. 우리 경교도들은 하느님의 아들로 보지만 불교식으로 치면 그렇다는 거요. 그래서 부처님도 서방정토(西方淨土)를 말씀했던가 보오. 미래불이 탄생할 서쪽의 복된 땅 말씀이오.”

서방정토, 그거 말 된다. 우리 고려에서 서방정토는 부처님이 나신 천축국을 가리키지만 부처가 가리킨 서방정토는 천축국이 아니다. 천축국의 서쪽나라인 것이다. 그게 대식국일 수도 있고 대진국일 수도 있었다. 지상의 나라가 아니라 천상의 나라를 비유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왜 여태 그 생각을 못했을까요? 부처님이 가리킨 서방정토! 강도로 귀환하면 수기 스승께 청해보겠습니다.”

“고맙소. 한 가지 더 있소. 승정께서 태자 저하와 친분이 깊다는 거 잘 알소 있소. 태자 저하와 황제께 우리가 무인정권을 몰아낼 준비를 주도면밀하게 해오고 있다고 알려주시오. 선사 소군께서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도 말씀드리는 게 좋겠소. 때가 되면 은밀히 찾아뵙고 나서 거사를 도모할 참이오. 우리는 반란군이 아니오.”

“그야 어렵지 않지요. 태자 저하께서도 틈을 노리고 계시오.”

“고맙소. 머잖아 최이 집정의 명줄이 끊어질 거요. 그의 아들 최항이 집권하면 지금보다 세력이 약화될 거고. 우리는 차츰차츰 세를 불리다가 그때 가서 봉기할 참이오.”

무서운 이야기였다. 천기누설인 것이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전추산의 아내가 팔이 하나 없는 여인과 소쿠리를 가지고 들어왔다. 삼베보자기를 들추니 보래개떡이 나왔다.

“촌장님, 공방식구들 간식거리 한번 만들어온다는 게 형편이 안 닿아 이제야 왔네요. 맛이나 좀 보셔요.”

절구통 같이 땅딸막한 아낙네가 시커먼 손으로 개떡 하나를 들고서 김승에게 건넸다.

“뭣 하려고 이런 수고를! 고맙기도 하셔라.”

김승은 천연덕스럽게 개떡을 받아들고서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아낙네는 나를 흘끔 쳐다보더니 내게도 개떡 하나를 집어주었다. 비위가 약해서 청결치 못한 건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지만 싫은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전추산의 아내가 보리차를 따라주었다. 보리차부터 마시고 개떡을 조금 찢어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후출했던지 김승은 벌써 두 개째를 먹고 있었다. 여인들이 나가자 나는 보리차로 꾸르륵 소리를 내어 입을 씻었다.

“마저 들지 그래요. 화전민 자매님이 장만해온 귀한 음식인데.”

김승이 내가 남긴 개떡 쪼가리를 집어 들었다.

“세끼 외에는 주전부리를 잘 안하오.”

“하긴 소식하는 게 수행자의 첫째 미덕이지요. 보여드릴 게 있소. 나가십시다.”

김승은 개떡 소쿠리를 들고 일어섰다. 남은 개떡을 옆방에 넣어주었다. 가온은 주몽 판화를 새기는 데 열중해 있었다.

우리는 말을 타고 약초골 공방으로 달려갔다. 공방에서 김승이 내게 보여준 건 창과 칼, 화살 따위의 병장기들이었다.

“최신식 비밀병기, 화약을 제조하려고 노력하고 있소. 화약만 제대로 만들면 무신정권 따위는 새 발의 피요.”

김승이 화약 뭉치를 조금 떼어 불속에 던지자 천둥소리가 울리며 폭발했다. 충격적이었다. 동시에 이 혁명세력이 현실적으로 성공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쪽방 사물함에는 불교계 실세들의 계파와 성향을 조사한 자료들, 문인들의 명단이 적힌 두루마리들까지 있었다. 붉은색과 파란색으로 방점을 찍었는데 포섭했거나 포섭할 대상이라고 했다. 과연 준비가 철저했다. 김승은 쪽방을 나서며 이번에도 찌그러진 세존상의 정수리에 향을 꽂았다. 지양의 친부 전각가 서씨와 화적패 두령, 농민들, 그리고 대장경 경판들이 불타 섞인 재로 만든 세존상이었다. 진리의 말씀이 살아있다면, 그리고 불타 죽은 이들의 혼백이 있다면 김승의 편이 돼줄 것 같았다. 아니, 나라도 김승의 편이 돼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저녁에 세찬 비가 내렸다. 숙소 등잔불 아래서 성경을 읽고 읽는데 전 장군의 기별이 왔다. 판각 공방 2층 누각에서 탁연이 찾는다고 했다. 삿갓에 도롱이를 뒤집어쓰고 판각 공방으로 갔다. 공방 마당에는 비바람에 떨어진 돌배와 나무이파리들이 어지러웠다. 전 장군은 계단 위까지 따라와 문을 열어주고 돌아갔다.

“오서 오세요, 승정.”

탁연은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두부조림과 미역귀, 호두를 담은 안주 접시가 보였고 솔향기가 그윽했다.

“송국주(松菊酒)요. 오늘 같은 밤에는 술에 취해보는 것도 괜찮지요. 나는 비 내리는 밤이면 이렇게 창문을 열어놓고 돌배나무에 비바람 몰아치는 광경을 보면서 홀로 취하곤 하오.”

탁연은 옆 자리를 권했다. 창밖 어둠 속으로 뻗어나간 불빛에 비 젖은 배나무 잎들이 번들거렸다. 나는 옆 자리에 앉아서 탁연이 건네는 술잔을 기울였다. 아까 낮에 폭포 옆에서 마신 맥주보다는 독했지만 향기가 더 좋았다. 내가 석 잔의 술을 기울였을 때, 탁연이 벽에 세워두었던 거문고를 들고 왔다. 안족(雁足)을 움직여 조율한 그가 술대를 쥐고 줄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솔향기와 국화향기가 퍼진 실내에 봉황울음소리가 울렸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비바람소리와 마주친 거문고소리가 절묘한 화음을 만들어냈다.

이제까지 봐왔던 탁연과는 전혀 다른 풍모였다. 깐깐하고 데데한 탁연은 온데간데없고 깔끔한 풍류남아가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소리를 길어 올린다.

“인생은 말이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조화라오, 조화.”

잠시 연주를 멈춘 탁연이 비 젖은 배나무 잎들을 지그려보며 읊조렸다. 나는 말없이 듣고 앉아있었다.

“돌이켜보면 불협화음의 연대를 살아온 삶이었소이다. 명문가에서 나서 궁궐에서 벼슬을 살았고 중이 되었소. 그러다 불가의 중살이에 회의가 들어 중국으로 건너갔지. 그리고 지금은 경교승이 되어 이 변방에서 하염없이 저물어가고 있소. 부조화 속에서 부단히 조화를 꿈꾸고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애써온 나날이었던 셈이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내 삶을 회상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처럼 불협화음의 연대를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조화를 꿈꾸고 실현하고자 애써왔다기보다는 불만 속에서 제2의 권력을 찾아 순응해왔다. 세속권력의 패배자가 종교권력의 승리자가 되어 나름대로 충실히 직무를 수행해왔다. 나는 모험을 알지 못하며 술수나 혁명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한다. 전형적인 먹물 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인생은 결국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소.”

탁연은 다시 한 바탕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다. 비는 좀처럼 그칠 줄 몰랐고 탁연의 거문고소리도 길래 이어졌다. 취기가 돈 나는 탁연의 방 기다란 의자에 누워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날 아침은 말끔히 개었다. 나는 판각 공방의 어질러진 마당을 싸리비로 말끔히 쓸었다. 그 사이 말벌들이 날아와 깨진 배의 과즙을 빨고 있었다. 미처 익기도 전에 떨어진 과일도 어떤 생명에게는 먹이가 되는 게 세상이었다. 설익은 생이라고 원망할 일도, 농익은 생이라고 뽐낼 일도 아니다. 자기 앞의 생을 살다 가면 그뿐이다.

나는 며칠 동안 가온과 함께 마을 구석구석을 돌며 난생 처음으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털북숭이 사자견과도 많이 친해졌다. 우리는 셋이서 마을사람들을 만나고 들꽃을 구경하고 지치면 나무그늘에 들어가서 노닥거렸다. 눈만 뜨면 책을 읽거나 일에 매달려야 했던 이제까지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나날이었다. 책을 읽지 않아도, 일에 매달리지 않아도 마음에 조급증이 일지 않았다. 며칠쯤 머릿속을 비워둔다고 세상이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다. 어쩌면 내가 없어도 이 세상은 변함없이 잘 돌아갈 것이다. 애초 있지도 않았던 것, 성립하지도 않았던 문제들로부터 스스로 놓여나면 이렇게 마음이 편해진다. 무지와 집착이 병통이다. 우주의 본바탕을 알고 집착을 놓아버리면 그 순간이 극락이요, 천국이 됨을 태어나 처음으로 체험했다. 내 얼굴은 빛났고 눈빛은 맑아졌다. 가온이 뿜어내는 밝은 빛의 영향을 받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몹시 미워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쳐요. 그것만 사라져주면 천국이 될 거라고 믿죠. 정말 그것이 사라지면 천국이 될까요? 문제는 저마다 사라지기를 바라는 게 제각각이라는 거예요. 어쩌면 그 자신도 누군가에 의해 간절히 사라지기를 바라는 대상일 수 있겠죠.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그게 없다면 세상은 완전한 세상이 아니죠. 완전한 세상에서 그것 하나가 빠진 세상이 되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미워하는 것이 사라지기를 바라지 말고 아름답게 변하도록 도울 일이에요.”

가온이 개울가에서 발을 씻으며 내게 한 말이다. 다시금 놀라는 아름다운 영혼이다. 그 안에 부처가 깃들어있고 예수가 살고 있었다. 나는 가온이 한 말들을 적어 탁연에게 건넸다. 탁연이 정리하고 있는 가온의 어록이 자못 궁금하다.

아침 밥상머리에서 김승 촌장이 국수 얘기를 꺼냈다. 절집에서는 국수를 승소(僧笑)라고 한다. 매일 먹는 밥에 물린 스님들이 국수를 대하면 반겨 웃는대서 나온 정겨운 이름이다.

“메밀이나 칡 국수 말고 밀국수 말씀이죠?”

전 장군의 아내가 숭늉을 내놓으며 김승에게 확인했다. 김승이 그렇다고 대꾸했다. 전 장군의 아내는 밀가루 구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때 가온이 나섰다.

“내가 구해볼게요. 검모포에 가보죠 뭐.”

“거기서 못 구하면?”

전 장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녕현으로 갈 거예요.”

“거기서도 못 구하면?”

“완산주까지 가서라도 구해보죠.”

“우리 가온이가 저런답니다.”

전 장군이 나를 보며 넙죽 웃었다. 말이나 당나귀라도 타고 나가라고 했지만 가온은 동이를 이고 걸어서 바디고개를 넘었다. 아이들이 몰린다며 사자견도 내게 맡겨두고 떠났다. 나는 그런 가온을 바디고개까지 배웅했다.

“뙤약볕에서 더위 먹겠는 걸!”

“국수를 빚어서 촌장어르신과 어머니, 지밀 승정, 산중식구들을 먹인다고 생각하면 이깟 더위쯤은 아무것도 아녜요. 오히려 신이 나는 걸요.”

가온은 고갯길을 씽씽 달려 내려갔다. 나는 한참 동안 그의 뒷모습을 좇고 서 있다가 사자견을 데리고 돌아왔다. 전 장군의 아내는 워낙 야무진 살림꾼이라 메밀을 불려 절구에 찧고 있었다.

저물녘에 가온이 돌아왔다. 소쿠리 덥힌 동이를 이고 귀가하는 가온의 표정은 밝았다. 부녕현에서 밀가루 한 말을 구했다며 좋아죽었다.

“도중에 소달구지를 얻어 타고 와서 그리 힘들진 않았어요. 보세요, 이 고운 밀가루를요.”

나는 가온이 인 동이를 받아서 평상에 내려놓았다. 소쿠리를 열었는데 거짓말처럼 동이가 텅 비어있었다. 밀가루는 바닥에 한 줌이나 남아있을까 말까였다. 나는 보았다, 손잡이 아랫부분에 뚫린 작은 구멍을. 그 구멍으로 새어나간 밀가루는 마냥 바람에 날려 대지에 산산이 흩어져버렸던 모양이다. 안 봐도 그림이 생생하다.

“까불리던 달구지 위에서 구멍이 났나보네요. 그것도 모르고 신나라 이고 왔어요.”
가온이 웃었다.

“우리 가온이 울게 생겼구나.”

고모부인 전 장군이 놀렸다. 가온은 울상은커녕 도리어 엄숙해졌다.

“애초 집을 나설 때도 동이는 비어 있었잖아요. 도중에 욕심껏 가득 채웠으나 끝내 비워야 가는 곳, 이게 아버지나라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에요.”

그날 그 자리에서 그 광경을 목격했던 모든 이들은 충격을 받았다. 이게 가온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걸까. 전 장군의 아내는 메밀국수를 만들어서 마을사람들을 배불리 먹였다. 메밀국수를 먹는 동안 나는 온통 가온에 대한 생각으로 입맛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가온에게 깊숙이 경도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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