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장기 저성장의 문턱에 들어선 한국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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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중장기적으로 한국 경제는 출산율 하락과 인구 고령화로 성장률이 하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이미 장기 저성장의 문턱에 들어섰다는 경고는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향후 5년간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전 세계 184개 국가의 평균치를 밑돌 것이라고 전망했다.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끌어내린 삼성경제연구소는 “장기 저성장 국면에 진입할 징후(徵候)가 나타나고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은 최빈국에서 50여 년 만에 선진국 수준에 오른 유일한 나라다. 고도성장에 익숙한 우리에게 ‘저성장’은 낯선 단어다. 먼 미래의 일로만 여겨져 온 저성장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성장률이 떨어지는 것은 일종의 ‘통과의례’다. 인구 증가가 둔화되면서 노동공급의 증가세가 꺾이고,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자본축적의 증가 속도도 더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장률 저하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국의 사정은 좀 다르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너무 빠르게 진행돼 저성장의 충격이 어느 나라보다 클 조짐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리 저성장 시대에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저성장이 찾아오면 일자리가 줄어들고 국민소득이 정체된다. 세수(稅收) 기반은 좁아지고 복지 비용이 늘어나 재정을 악화시킨다. 또한 저성장은 저금리와 함께 찾아오기 마련이다. 금리가 국민연금 등의 기금 운용수익률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국민연금의 경우 수익률이 1%포인트만 줄어도 연금 고갈(枯渴) 시기가 5년 앞당겨진다. 앞으로 저성장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국가는 물론 우리 개개인의 운명까지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저성장을 치유할 만병통치약은 없다. 인위적인 경기 부양이나 금리 인하는 금물이다. 물가 상승이나 가계부채 증가, 재정건전성 훼손이라는 부작용을 낳는다. 오히려 중립적인 거시정책을 유지하면서 장기적인 종합대책을 꾸준히 펴나가는 게 중요하다. 무엇보다 출산 장려와 고령화 대비책은 지속적으로 펴나갈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인적 자본의 질을 높여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연구개발을 통한 미래의 먹거리 발굴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 성장률 하락은 불가피하다 치더라도, 성장률 하락 속도를 완만하게 만드는 방법은 고민해야 한다.

 올해는 향후 5년간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대선이 치러진다. 온 사회가 복지논쟁에 휩쓸려 경제성장을 외면하는 조짐이다. 한은이 성장률 전망치를 3.5%로 끌어내려도 시큰둥한 분위기다. 이러면 우리는 예상보다 빨리 저성장 시대를 맞게 된다. 정치권이 연말 대선에서 복지 이슈를 넘어 지속가능한 성장 모델을 놓고 치열한 대결을 벌이길 기대한다. 규제 완화를 통해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내수를 활성화시키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기존의 한국형 모델을 대체할 새로운 성장 모델이 발등의 불이 됐다. 한은 김 총재는 “과거의 양적인 요소투입형 성장에서 이제 질적인 생산성주도형 성장으로 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어려운 해법이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