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운영의 독서 칼럼] 누가 우리를 속였는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타리크 알리가 편집한 이 책 '전쟁이 끝난 후' (이후.2000) 는 우선 불온하다.

미국은 '우둔한 깡패' 이며 클린턴을 '전범 재판' 에 부치라는 아찔한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블레어는 '애송이 연극 배우' 로서 '클린턴의 영국인 잡역부' 라는 무례한 언사도 나온다.

그리고 화려하다. 촘스키.블랙번.드브레.사이드를 비롯해 그 이름만으로도 주눅이 드는 필자들을 이렇게 한데 모아놓기가 어디 그리 흔한 일인가.

그러나 정작 내가 놀라는 것은 그런 불온함이나 화려함 따위가 아니다.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어쩌면 이렇게 속았느냐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 코소보를 불의 제단으로

1899년의 보어 전쟁 와중에 막이 오른 20세기는 코소보 전쟁으로 막을 내렸다.

그제나 이제나 살육으로 점철된 역사의 작희(作戱) 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살육 자체보다 한층 더 통탄할 일이다.

1999년 3월 24일부터 6월 3일까지 나토와 유고가 벌인 코소보전쟁이 이 책이 만들어진 배경이고, 그 책임을 밝히려는 시도가 이 책에 담긴 문제 의식이다.

이 79일 동안의 전투에서 나토 군은 마치 스타크래프트 놀이하는 기분으로 유고 방위군과 민간인 1만5천명을 희생시키고 80만명을 난민으로 내몰았다.

나토는 1백20억달러의 전비를 쓰고 유고의 재산 손실은 1천4백60억달러에 이르렀으니, 비용 대비 전투 성과는 - 파괴의 생산성은 - 아주 '효율적' 이었던 셈이다.

피해 당자들에게는 차마 못할 말이지만 전쟁이란 무릇 그런 고통을 초래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다수가 수긍하는 명분과 실리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고한 학살에 불과하다.

나토의 참전 명분은 코소보 알바니아계 주민을 강제로 추방하려는 세르비아계 대통령 밀로셰비치의 폭거를 중단시키려는 '인도적' 개입이었다.

이 책의 필자들 또한 독재자의 '인종 청소' 만행을 저지하는 인도주의 실천에는 한치도 이의가 없다.

이들의 항의는 오히려 나토를 앞세워 미국이 코소보를 초토로 만든 이 전쟁이 밖으로 내건 명분과는 달리 전혀 인도적이 아니었다는 점에 있다. 인도주의의 훼손이야말로 이 전쟁이 저지른 가장 교활한 범죄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동향의 사부 브레진스키의 교시로 올브라이트가 각본을 쓰고 클린턴이 메가폰을 잡은 이 전쟁은 결코 코소보의 인권이 아닌 미국의 필요를 위한 전쟁이었다.

소련과 동구가 와해된 오늘 나토의 존재 이유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미국의 과도한 유럽 개입에 반대 여론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나토의 건재와 미국 통수권의 본때를 말이 아닌 힘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이런 원모(遠謀) 의 희생양으로 코소보를 불의 제단에 올렸다는 것이다.

지상군 투입으로 자국 병사가 희생되면 국내에 반전 기운이 비등하므로, 1백20만달러짜리 크루즈 미사일과 3천5백만달러짜리 스텔스 폭격기가 전투를 대행했다.

조종사의 안전을 위해 3만피트 고공에서 내리쏟는 폭탄은 어처구니없이 지하 참호 대신 학교와 병원을 들이쳤지만, 소련 붕괴로 고객이 줄어든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회심의 미소를 보냈다. 쉽지는 않아도 여러 군데 평화적 해결의 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주권 국가로서는 도저히 수락할 수 없는 굴욕적인 조건을 내밀어 밀로셰비치의 거부를 진작에 유도하고, 러시아의 건설적인 중재안조차 발칸 지역에 패권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기도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필자들은 "미국과 나토의 힘의 과시야말로 이 전쟁의 진정한 목적" (71쪽) 이라고 분연히 외친다.

즉시 이들은 '여론 몰이' 에 앞장선 언론에 화살을 돌린다.

인간 사냥에 나선 최첨단 병기의 효율성을 텔레비전 생중계로 관전하며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3명의 미군 병사 운명은 25만 코소보 난민의 강제 이주보다 중요한" 것처럼 화면과 지면을 편집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 조작으로 "한 무더기의 희생자를 위해 흘리는 눈물은 그들의 억압자에게 떨어뜨리는 폭탄과 연결되었다" (1백60쪽) . 그래서 폭탄이 옳다는 언론의 세뇌와 선동에 힘입어 '인도적 제국주의' 마케팅이 성공한 것이다.

지식인도 무사하지 못하다. 이런 때마다 재발하는 언론의 '백치 증세' 야 새삼 놀랄 일이 아니지만, 거기에 휩쓸려 전쟁에 동조한 학자들도 해독(解毒)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필자들의 엄한 질책이 나로서는 이 책의 독서에서 가장 고통스런 대목이었다.

*** '인도적 제국주의' 마케팅

일상의 보도를 통해 우리는 밀로셰비치가 유고의 히틀러이고, 코소보 알바니아계는 히틀러 치하의 유대인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코소보 성전에 나서는 나토폴리탄(Natopolitan) 십자군 응원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현실의 다른 한 면을 마저 보라고 권하지 않는가.

하나의 사실이 둘로 맞설 수 없다면, 주류 언론의 논객이든 이 책의 필자들이든 어느 한 편에 우리가 속은 것이 확실하다.

그것도 아주 무참하게! 그 진실을 가리는 일은 나의 분수를 넘는다.

다만 나토 비행기가 3만6천회 출격으로도 청소하지 못한 밀로셰비치 정권을 유고 민중이 민주 선거로 청소한 것은 정녕 이 전쟁이 제기하는 참담한 역설이다.

인도주의마저 전쟁의 '바람잡이' 로 팔아먹는 신판 '용감한 새 세계' 가 이 화려한 세계화 시대의 세계 질서인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