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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 연회의 꽃, 물만두·밀국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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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호 32면

요즘은 수입 밀 덕분에 밀가루가 흔하지만, 100년 전까지만 해도 너무도 귀하여 진가루(眞末)라 했다. 주로 화북(華北·중국의 북부)에서 수입해 그 값이 대단히 비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례(成禮) 때가 아니면 밀가루를 재료로 하여 만든 음식은 거의 먹지 못했다. 심지어 왕실에서조차 밀국수는 정말로 경축스러운 행사 때 외에는 먹지 못했고 거의 대부분 메밀국수로 대체했다.

김상보의 조선시대 진상품으로 본 제철 수라상 <18> 밀

밀은 서남아시아의 ‘비옥한 삼일월(三日月) 지대’에서 9000년 전부터 재배되기 시작했다. 4000년 전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중국에 전파돼 황하 문명의 경제력을 제공했다. 한반도에는 2000년 전 화북을 통해 들어와 재배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밀가루를 원료로 해서 만든 것을 병(餠), 밀가루 이외의 가루제품을 이(餌)라 하였다. 병이든 이든 근본적으로 곡물을 가루로 만들어야 가능한 음식이다. 밀은 배유 부분이 부서지기 쉽기 때문에 밀밥을 만들어 먹으려면 햇볕에 바싹 말린 후 물을 조금 넣어 부드럽게 한 다음에 가볍게 찧어 껍질을 제거해야만 밥을 지어 먹을 수 있었다.

이런 복잡한 공정을 피하고 쉽게 식품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은 가루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다. 이때 체를 사용해 밀가루와 밀기울을 분리하게 된다. 그래서 제분 역사에서 가루로 만드는 맷돌·갈돌, 명주를 씌운 깁체는 중요한 역사적 위치를 점한다. 중국에서는 진(秦)·한(漢)대에 이미 이들이 나타났고 후한(後漢, 28~220) 시대에는 국수를 만들어 먹고 있었으며, 축력(畜力)을 이용한 맷돌인 연자매가 삼국시대(220~280)에 등장했다. 고구려 담징 스님이 일본에 가서 법륭사에 벽화를 그리는 한편 연자매에 속하는 연애도 만들었다 하니, 한반도 역시 일찍부터 연자매에 의한 제분 기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서는 맛있는 음식을 뜻하는 ‘식미(食味)’ 십여 가지 중 면식(麵食)을 으뜸으로 삼았고, 제례에 면을 올렸다. 또 사찰에서는 면을 만들어 팔았다. 이 면이 밀가루인지 쌀가루인지는 현재로선 분명하지 않지만 가루로 만든 국수류가 식미의 하나였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조선 왕조는 소맥(小麥·밀)은 전라도의 구례·김구·고산·곡성·김제·남원·담양·장성·정읍·함평 등에, 소맥미(小麥米·밀쌀)는 전라도의 고창·광주·능주·무주·임실·전주·태인·화순 등에 진공(進貢)이란 형태로 부과했다(『여지도서(輿地圖書)』, 1757).

거두어 들인 밀은 술제조용 누룩을 만들어 양조에 썼다. 제분한 밀가루는 명나라 사신 접대·혼례·제례·환갑연 등과 같은 성대한 연회에서 유밀과나 국수 또는 만두를 만드는 데 주로 사용했다. 정조대왕이 어머님이신 혜경궁 홍씨의 환갑연 때 베풀어 올린 찬품으로 예를 들어보면, 밀반죽피로 만든 일종의 물만두를 ‘수상화(水霜花)’라 했고 밀국수를 ‘낭화(浪花)’라 불렀다. 밀가루에 달걀을 넣고 반죽해 홍두깨로 얇게 밀어 썰어서 끓는 물에 삶아낸다. 다시 찬물에 헹구어 사리를 만든 다음 볶은 오이와 표고버섯·석이버섯, 달걀반숙, 돼지고기 편육·잣을 넣고 닭고기국물을 부어 올린 것이 ‘낭화’다.

이렇듯 술이 동반되는 격이 높은 연회에서 밀국수나 밀만두가 올려진 것은, 밀가루가 귀하여 값이 비싼 이유도 있었지만, 밀가루의 약성(藥性)이 술을 마신 후 나타나는 흉부의 열감과 갈증을 그치게 하는 데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밀만두나 밀국수가 고급 술안주의 역할을 담당한 셈이다.

그래서 경제력이 좀 있는 반가에서는 술좌석에 밀국수를 냈다. 1670년경에 나온 『음식지미방』에는 ‘낭화’가 ‘난면’이란 명칭으로 둔갑되어서 “달걀을 밀가루에 섞어 반죽하여 칼국수로 만들어 꿩고기 삶은 국물에 말아 쓴다” 했다. 이 난면법은 1800년대 말에 나온 『시의전서』로 이어졌다. ‘난면’은 궁중음식 ‘낭화’가 반가로 전해지면서 어떻게 명칭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예다.

술안주로서 밀국수는 기생이 있는 고급술집에서도 보인다. 기산(箕山)이 1800년대 말에 그린 ‘기생방의 배반’을 보자. 장구와 거문고가 놓여 있는 방 안에서 한 명의 기생이 국수장국을 주안상 밑바닥에 놓고는 받침 접시 위에 올려진 술잔에 술을 따르고 있다. 그 옆에는 네 명의 선비가 술을 마시면서 술안주로 국수를 먹으며 풍류 속에 빠져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밀누룩으로 만든 술·밀국수·거문고와 장구를 포함하는 향악과 아악은 궁중연에서 술·술안주·악(樂)이라는 풍류에서 빠질 수 없는 삼위일체가 되어 있었지만 기생집에서도 같은 흐름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당대의 명기 황진이(黃眞伊, 1500년대 말)도 다음과 같은 애잔한 시조 한 수를 남겼다.

‘달빛 어린 마당에 오동잎은 지고 / 차가운 서리 속 들국화는 노랗게 피어있네 / 다락은 높아 하늘과 1자(尺) 사이라 / 사람은 취하여 술잔을 거듭하네 /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에 화하여 차가웁고 / 피리 부는 코끝에 매화향기 그윽하도다 / 내일 아침 이별한 후는 / 우리들의 그리움은 푸른 물결과 같이 끝이 없으리.’



낭화(浪花)
밀가루에 달걀을 넣고 반죽해 홍두깨로 얇게 밀어 썰어서 끓는 물에 삶아낸다. 찬물에 헹구어 사리를 만든다. 볶은 오이와 표고버섯·석이버섯, 달걀반숙, 돼지고기 편육·잣을 넣는다. 닭고기국물을 부어 올린다.


한양대 식품영양학 박사『. 조선왕조 궁중의궤 음식문화』『 한국의 음식생활문화사』『 조선시대의 음식문화』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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