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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자격, 부모의 자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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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기선민
중앙SUNDAY 기자

요새 JTBC의 ‘아내의 자격’을 즐겨 본다. 지상파 3사를 제외한 전 채널 최고 시청률을 올렸다는 드라마다. 초등생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어서인지 대치동 교육전쟁과 부모들의 천태만상에 경탄 반, 공감 반이다. 주인공은 경쟁보다는 심성이 중요하다 믿고 살아온 엄마 서래(김희애). 남편과 시집 식구의 성화에 못 이겨 대치동으로 이사한 그는 살벌한 현실과 마주친다. “인간 딱 두 부류야. 갑(甲)과 을(乙). 기왕이면 내 아들이 갑이면 좋겠거든” “내 딸은 1%, 귀족으로 컸으면 좋겠어” “저렇게 성적에 신경 안 쓰다 천민 되는 거 순간이다.”

 드라마인 만큼 과장과 비약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은 편치 않았다. 그들에게서 ‘일등, 일류, 1%’를 내심 열망하는 대한민국 부모들의 자화상이 보였기 때문이다. 책과 자연을 벗 삼아 자란 서래의 아들은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큼 반듯한 심성을 지녔다. 그런데도 서래는 자식 잘 키웠다고 칭찬받기는커녕 ‘엄마의 자격’을 의심받는다. 아이가 학원 국제중 준비반 입학시험에서 꼴찌를 해서다. 교육의 목표가 어느새 명문대 입학, 돈 잘 버는 직업 구하기로 변질된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착잡할 정도로 리얼하다.

 드라마에 자꾸 현실을 대입시키다 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얼마 전 내한한 세계은행 총재 후보지명자 김용 다트머스대 총장이다. 한국 부모들은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버드대 박사, 아이비리그 대학 총장, 아시아인 최초의 국제금융기관 수장’이라는 ‘간판’만 높이 사는 건 아닐까. 내 자식을 ‘초일류 엘리트’로 키우겠다는 부모들의 욕망에 그저 또 하나의 성공 사례로 소비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참 유감이다. 그의 성장 과정을 보면 방점은 다른 데 있었다. 어머니 전옥숙 여사는 어린 아들에게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얘기를 들려주며 “사회정의를 위해 일해야 한다” “위대한 것에 도전하라”는 자극을 끊임없이 줬다고 한다. 김 총장이 의대 졸업 후 인류학으로 방향을 튼 이유이며, 개도국 결핵퇴치 운동에 앞장서는 등 봉사와 나눔의 삶을 살게 된 배경이다. 이것은 큰 성취를 거둔 한국계 미국인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철학이다. 5년 전 책 출간 때문에 방한한 전혜성 여사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인권 담당 차관보를 지낸 고홍주 전 예일대 로스쿨 학장의 어머니다. 당시 세간의 관심은 ‘6남매를 명문대에 진학시킨 어머니’라는 데 집중됐었다.

 정작 전 여사의 ‘비법’은 예상 밖이었다. “항상 아이들에게 ‘남과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돼라’고 일렀다. 보탬이 되려면 일단 한 분야에서 탁월해야 한다. 그렇게 목적의식을 세워주니 알아서 열심히 공부했다.” 귀족과 천민, 1%를 들먹이는 지금 우리와 이타심과 공익을 위한 성취를 강조하는 이들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내 자식만 잘 살길 바라는 속물적인 이기심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부모의 자격조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