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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와 10시간] 당돌한 n세대 이정현

중앙일보

입력

그녀는 "30분 이상 인터뷰를 해 본 적이 없다" 고 했다. 몇달 동안 하루 두시간 이상 자지 못했다고 한다.

가장 힘든 게 뭐냐는 질문에 "잠이 부족한 것" 이라고 대답하는 그녀를 붙잡고 장시간 인터뷰를 하기란 사실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긴 인터뷰를 하지 않은 것은 빡빡한 스케줄 탓보다도 그녀가 견디지 못한 때문은 아닐까.

누군가는 그녀를 만난 뒤 '스카이콩콩이나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기분이었다' 고 했다. 과연 대부분의 대답이 살아있는 듯 톡톡 튀며 테이블을 건너왔다.
때로는 정색을 하고 눈을 크게 뜨며 "기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반격을 서슴지 않았다.

당돌하고 직선적인 n세대

요컨대 그녀는 '3분 안에 (웃음이)터지지 않으면 곧바로 TV채널이 돌아간다' 는 비디오 세대의 한 전형이었다. 지루함, 길어 지는 대화, 빙 돌려 주고 받는 질문과 대답 같은 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3분 내외의 짧은 노래와 뮤직비디오 한편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하는 인터넷 시대 댄스 가수의 한 상징인 그녀. 30분은 어쩌면 대화의 임계점을 뜻한다. 그 임계점을 훨씬 지나자 마치 처음 '소개팅' 을 하는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올해 스무살. 열다섯살 때 영화 '꽃잎' 에서 5월 광주의 참혹한 경험으로 정신이 나가버린 소녀 역을 완벽하게 해내 일거에 스타가 된 영화 배우. '바꿔' 신드롬을 낳으며 단시간에 톱의 자리에 오른 가수. 혹시 그녀는 너무 이른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얻은 것은 아닐까.

"너무 빨리 큰 거 아니냐는 거죠? 절대 아니에요. 이제 시작이에요. 두고 보세요. 아직 멀었어요. "

"노래가 재미있지요. 연기는 사실 너무 힘들어요.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요. 드라마나 MC같은 건 안할래요. 다음 영화를 고르고 있어요. 장선우 감독님의 SF영화를 비롯해 이런 저런 제의가 많이 들어오지만 신중해야죠. "

그녀는 "한 방송사는 잡담하는 프로에 안나간 벌로 한달 동안 쇼프로 출연을 정지 시킨 적도 있다. 진짜 웃긴다" 며 "아무리 그래도 개그 프로 같은 데엔 절대 안나간다" 고 했다.

노래 재미있고 연기는 힘들어

올 여름 개봉 된 공포 영화 '하피' 이야기를 했다. 이정현은 "어휴, 그 이야기는 하지도 마세요" 라며 머리를 흔들었다. 영화사와 인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출연했다고 했다.

"영화는 망했지만 영화사에 의리는 지켜 잘 했다고 생각한다" 는 것이다. 어찌나 하기 싫었든지, 뒷모습만 나오는 상당 부분은 대역을 사용했다고 한다.

개봉 당시 "〈꽃잎〉에서 보여줬던 열연은 온데 간데 없고 좀 심하게 말하면 '하기 싫은 연기를 억지로 한다' 는 느낌마저 준다" 고 했던 평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정말 싫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지 말았어야 했고, 일단 나갔다면 힘을 다했어야 했다. 그게 진짜 프로페셔널이고, 장수하는 연기자들의 공통점이다.

누군가 그녀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옳지 않을까라고 지적하고, 그녀가 그런 지적을 얌전히 '네' 하고 수용하는 모습을 기대하기 힘든 분위기가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철저한 자유로움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그런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것이 앞으로 배우로서 또는 뮤지션으로서 대성하는데 장애가 될지 거름이 될지는 쉽게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함께 음반 작업을 했던 가수 조PD에 대해서는 "말도 잘 하지 않고 좀 권위적인 이상한 사람" 이라며 입을 삐쭉 내밀어 보였고, 신바람 이박사의 노래에 대해서는 "웃긴다" 고 잘라 말했으며, 어려서부터 팬이었다는 서태지의 새 음반에 대해서는 "독창적인 게 없어 아쉽다" 고 했다.

대화 중간중간에 "완전히 죽음이었다니까요" "저 정말 시체였어요" "장난 아니에요" 같이 그녀의 또래가 쓰는 표현들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바꿔' 요?… 그거 테크노 아니에요 그녀에게 붙여진 별명은 '테크노 여전사' . 그러나 '바꿔' 를 비롯한 그녀의 노래들은 사실 테크노가 아니며 차라리 뽕짝이라는 지적은 설득력있다.

"맞아요. 그거 테크노 아니에요. 하지만 그때 진짜 테크노를 들고 나왔으면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들어줬겠어요? 어머, 쟤 뭐야 그랬을 거에요. 일단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죠. 그렇게 된 거에요. "

그녀는 헤어지기 직전 문득 "제일 궁금했던 게 뭐에요?" 라고 물어왔다.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는데 그녀는 마치 답변 제한 시간이 넘었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더니 차를 향해 마구 뛰어가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녀가 서있던 자리를 겨울비가 차지했고, '그녀에 대해 정말 궁금한 게 뭐였을까' 한참 생각했다.

이정현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는 조인스닷컴 기자포럼에 있다.

이정현은…

데뷔 영화 〈꽃잎〉의 시대적 배경이 된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1980년에 태어났다.

지금 사는 곳은 경기도 광명시. 경찰관(형사)으로 일하다 몇년전 정년 퇴직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딸 다섯 가운데 막내다. 유치원 때 이미 마이클 잭슨의 뒤로 가는 춤을 완벽히 재연하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등 상당한 끼를 보였다.

명덕여고 1학년 때인 95년, 수학여행 가서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상대로 펼친 그녀의 '심야 공연' 을 인상깊게 지켜본 지리 선생님으로부터 "영화 배우 뽑는다는 신문 광고가 났던데 오디션 한번 나가봐라" 는 말을 듣고 '꽃잎' 주연 배우 오디션장을 찾았다.

면접 장소에 늦게 도착, '오디션 다 끝났으니 집에 가보라' 는 관계자와 말다툼을 하고 있는데 집에 가던 장선우 감독이 "쟤 뭐냐? 마지막으로 한명만 더 보자" 며 오디션장으로 데리고 들어갔고 약 3천명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전격 캐스팅됐다는, 마치 미국 청춘 영화의 한 장면같은 데뷔 일화를 가졌다.

문성근과 공연한 '꽃잎' 에서 귀기(鬼氣)서린 듯한 열연을 펼쳐 호평을 받으며 청룡영화제 여자연기상 등을 수상했다.

99년 돌연 가수로 변신, 한국적 테크노라는 새 장르를 들고나와 성공을 거뒀다. 지난해 중앙대 영화과에 입학했으나 현재 휴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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