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급하다면서 성장은 나중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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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가장 시급하다. 그러나 성장잠재력 확충은 급히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일자리와 성장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인식이 서로 상충된 것으로 나타났다. 성장과 일자리는 불가분의 관계인데도 이를 별개로 생각한다는 얘기다. 아주대 현진권(경제학) 교수는 “선거전이 치열해지면서 복지가 성장의 대체물로 여겨지고, 성장은 단어 자체가 ‘나쁜 용어’처럼 비춰지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런 여론이 결국 표로 연결되고 잘못된 정책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며 “경제 이론과 대중적 여론의 간극이 벌어질수록 사회는 위기상황이 된다”고 말했다.

 1일 기획재정부가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의뢰해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가장 시급한 중장기 정책 과제로 일자리 창출을 꼽았다. 가장 시급한 정책을 5점, 전혀 시급하지 않은 정책을 1점으로 했을 때 평균 4.4점을 받았다. 저출산·고령화 대응(4.07점)과 사회적 통합 강화(3.96점)가 뒤를 이었다. 둘 다 복지정책 성격이 강한 사안이다.

 반면 성장잠재력 확충은 10개 조사 항목 중 꼴찌였다. 시급성 점수는 3.53점(보통)이었다. 국가 간 교역 강화(9위), 기업의 경쟁력 강화(8위) 같은 성장 관련 정책은 모두 후순위로 밀렸다. 미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추구해야 할 중점 가치를 묻는 질문에서도 국가경쟁력 강화를 꼽은 응답자는 14.4%에 불과했다. 이 문항에서 1위는 공정한 경쟁과 기회 보장(37.8%)이었다.

 수출 중심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낙수 효과가 적은 것도 이런 인식을 부추겼다. 최근 10년간 한국 경제는 연평균 4.1% 성장했지만 일자리는 연평균 1.2% 늘어나는 데 그쳤다. 고려대 조대엽(사회학) 교수는 “거시 경제가 좋아진다고 내 삶이 바뀌지 않는다는 인식의 반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일자리가 생계수단이나 돈벌이가 아닌 자기 실현적 성격이 강해졌다”며 “한국 사회는 성장을 앞세운 국가주의 패러다임에서 자기 실현에 초점을 맞춘 생활 정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시점에 있다”고 분석했다.

 한편 이번 조사에서는 정부의 잇따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에도 불구하고 국가 간 협력·교역 강화가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렸다. 일종의 ‘FTA 피로증’이 읽히는 대목이다. 일반인 조사(9위)에서는 물론이고 기업 최고경영자 268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대외 교역 강화는 9위(3.4점)에 머물렀다. 김재환 재정부 경쟁력전략과장은 “조사 결과는 중장기 전략을 수립할 때 우선순위 선정에 참고 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영훈 기자

중장기 전략 보고서

국가적 차원의 미래 과제를 찾고, 중장기 대응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보고서다. 영국·호주 등 선진국은 이런 보고서가 관례화돼 있다. 기획재정부는 1월 조직 개편을 통해 보고서 작성과 중장기 과제를 전담하는 장기전략국을 신설했다. 첫 번째 중장기 전략보고서는 9월 발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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