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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암행어사傳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64호 31면

사회생활을 하며 갖는 복 중 하나가 전공과 직업의 일치라면 나는 복이 많은 사람 축에 속한다. 정책결정론을 전공한 사람으로 경제기획원에서 시작해 30년간 정부 정책에 대해 고민하는 일을 해왔기 때문이다. 일을 하면서 어떤 때는 현실사회에서 개업한 정책학도(practitioner)의 한 사람이라는 시각에서 정책을 연구 대상으로 관찰하기도 했다.

일 때문이든 학문적 관심으로든 ‘실패하는 정책’에 대해 꽤 오래전부터 관심을 갖게 됐다. 일반적으로 정책은 사회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해 정책목표의 설정, 정책 결정, 집행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실패한 정책에 대한 내 관심은 이런 정책과정 전반에 걸쳐 문제가 없는데도 의도한 정책 효과를 내지 못하거나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는 왜곡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출발했다. 이런 현상을 시장 실패나 정부 실패 개념과 대비시켜 ‘정책 실패(policy failure)’란 용어를 쓰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

정책 실패는 엄청난 사회비용을 치르게 마련이다. 국민 세금을 낭비하고 정부의 신뢰를 떨어뜨린다. 사회 갈등을 초래하고 때로는 해결하려는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일하는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올해 도입한 저임금 근로자 사회보험료 지원정책이 만약 집행과정에서 나눠 먹기식으로 쓰여진다면 아예 도입하지 않았던 것만도 못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예일대 어빙 제니스 교수는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여 어리석은 정책 결정을 내렸던 외교 사례들의 원인을 분석해 ‘집단사고(groupthink)’라는 유용한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정책이 실패하는 다양한 사례를 설명하기에는 미흡했다. 정책 실패의 원인에 대한 답을 찾자면 많은 사례 연구와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실패한 정책의 원인과 해답의 상당 부분이 ‘현장’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 올해 가장 역점을 둔 정책의 하나가 청년 창업·창직 활성화다. 여러 차례 현장을 가보고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왜 기존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지 점검해 보았다. 정부 지원 사업이 공급자 위주로 되어 있었고, 창업 희망자가 원하는 컨설팅 제공이 미흡했다. 그래서 창업 희망자가 지원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도록 수요자 중심으로 바꿨다. 또한 은행이 함께 참여해 자금 지원과 컨설팅을 동시에 제공하도록 하는 비즈니스 모델도 만들었다.

# 대학등록금 지원 사업 현장을 보기 위해 얼마 전 대학에 간 적이 있다. 시행 초기에 사업의 틀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한 사업인데 일부 저소득층 성적 우수 학생의 경우 지난해 받던 장학금 혜택이 줄어든 것을 발견했다. 또한 지원 대상 소득분위는 아니지만 한 가구에 대학생이 둘이거나 가족 중 중증환자가 있는 등 특이 지출 요인이 있는 경우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종전 성적 우수 학생이 받던 장학금액은 다시 수준을 맞추기로 했고, 특이 지출 요인이 있는 학생의 경우 개선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 장애아를 보육시설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키우는 경우 36개월까지 지원하던 양육수당을 최장 84개월인 취학 전까지 지원하기로 한 것도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다. 보육 현장을 둘러보고 간담회를 하는 자리에서 장애아를 둔 주부로부터 시설에 맡기려고 해도 받아주지 않는 애로를 들었다. 양육수당 지원 대상을 확대하면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중종실록을 보면 중종 4년(1509년) 각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어사로 임명하는 임금의 봉서(封書)는 한성을 벗어나서야 열어볼 수 있었고, 개봉을 하면 집에도 들르지 못하고 폐의파립(弊衣破笠)하고 임지로 떠났다고 한다. 억울한 죄인이나 재판사례, 관리의 부정을 현장에서 확인하고 마패를 앞세워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치며 문제를 해결했다. 그야말로 현장 확인 행정인 셈이다.

아무리 훌륭한 정책도 현장에서 왜곡되게 집행하면 탁상공론이 되고 만다. 현장을 알고 정책을 결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집행과정에서 정책효과를 내지 못하는 요인이나 생각지 못한 사각지대는 없는지 계속 점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와 같은 감시기능이 아닌 정책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살펴보는 현대판 암행어사제도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정책 실패로 국민 세금을 낭비하지는 않는지 공직에 있는 자, 모름지기 항상 깨어 있어야 할 노릇이다.



김동연 대통령 경제금융비서관으로 금융위기 극복에 기여했고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으로 재정건전화를 주도했다. 미시간대 정책학 박사. 상고 졸업 후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행정·입법고시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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