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칼럼] 눈으로 듣고 귀로 보는 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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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우리가 평소에 느끼지 못하던 예민한 감각들을 인간에게 되돌려준다. 아이들의 천진 난만한 웃음,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어두운 그늘과 눈물, 구부정한 할머니의 느린 걸음걸이.

시각적인 인간의 몸짓은 언어로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전달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표현되지 않고 남아있는 감정, 내적 경험을 전달한다. 극장에 앉아 관객은 언어의 매개 없이도 단지 귀와 눈의 감각을 통해 사건, 인물, 감정, 분위기 심지어 사상까지도 경험할 수 있다. 영화는 그래서 가장 정서적인 표현 수단이 될 수 있다.

마틴 스콜세지의 '쿤둔'에서 우리는 영화의 이런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다. 이 영화는 분명 티베트의 종교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생애를 그린 작품이긴 하지만 결코 종교적인 영화나 티베트의 역사를 그린 역사극이 아니다. '쿤둔'은 귀와 눈의 예민한 감각을 필요로 하는 영화다. 귀를 기울이면 그동안 비밀스럽게 몸을 숨기고 있던 세계, 사물이 지닌 영혼이나 비밀스런 과거나 미래가 드러난다.

달라이 라마의 정신적인 능력은 일종의 텔레파시나 원격 통신에 가깝다. 달라이 라마가 늘 지니고 있던 망원경이나 즐겨 듣는 라디오, 그가 즐겨보는 영화(초기 무성 영화와 뉴스릴 필름)
는 이러한 정신적인 능력을 상징한다. 망원경이나 영화, 라디오는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을 볼 수 있게 하고 들을 수 있게 한다.

어린 꼬마 아이가 13대 달라이 라마의 유품을 단지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장면이나 정신 수련 과정에서 달라이 라마가 쥐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는 장면들은 일상적인 현실과 예민한 감각으로 파악되는 정신 세계를 갈라놓는다. 이 영화에서 소리, 음향, 음악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정신적인 능력과 더불어 달라이 라마는 현실에서 떠도는 불분명한 느낌의 소리를 예민하게 듣는다.

대상에 고착된 소리, 물질적인 세계에 속한 소리와는 달리 달라이 라마가 예민하게 지각하는 소리는 경험 불가능한 시공간의 세계로 그를 안내한다. 그렇다고 달라이 라마가 이 영화에서 초인으로 묘사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귀와 눈의 예민한 감각을 지녔을 뿐이다.

영화는 그런 달라이 라마의 어린 시절을 1인칭 시점에서 보여준다. 이런 주관적인 시점은 달라이 라마의 생애를 주관적인 기억으로 구성할 수 있게 만든다. 어린 꼬마 아이가 13대 달라이 라마의 유품을 고르는 장면이나, 성인이 된 달라이 라마가 중국의 모택동을 만나는 장면에서 이런 주관적인 기억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특히 달라이 라마가 모택동을 만나는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둘이 나누는 대화가 아니다. 모택동의 단정한 머리, 반짝거리는 구두, 닳은 소매가 차라리 예민한 이미지-기억을 제공한다. 스콜세지는 달라이 라마가 모택동과의 만남에서 인상적이라고 느꼈던 기억을 이미지로 표현했을뿐 그 민감한 정치적 상황을 묘사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스콜세지는 영리하게 티벳의 역사적 갈등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벗어나 개인의 독특한 생애를 형상화할 수 있었다.

1인칭 시점 때문에 관객은 그가 보고 듣는 것만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예민한 감각을 통해 달라이 라마가 깨닫는 세계의 비밀을 단지 보여주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영화는 그 자체 세계이다. 귀와 눈의 감각과 본능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그 세계안에 존재한다. 이 영화가 그토록 매력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단지 달라이 라마의 정신 세계를 지켜본다거나 그의 어린 시절을 쳐다보는 것만이 아니라 달라이 라마가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하나의 세계로서 보고 느낄 수 있다. 스콜세지는 지나치게 달라이 라마의 세계로 들어가지도, 또 너무 바깥에서 그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는 달라이 라마의 정신 세계, 특히 정치적인 행동을 하기 이전, 어린 시절의 예민한 감각들로 구성된 세계를 시청각적인 감각적 이미지로 단지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달라이 라마가 본격적으로 정치적인 행동을 시작하는 시기 이전에, 다시 말해 달라이 라마가 망명을 하는 시점에서 끝난다.

김성욱/영화평론가<cinefantom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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