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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피로사회』 저자 한병철, 도올 김용옥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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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현대인의 성공욕구와 우울증을 짚어본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왼쪽)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가 도올 김용옥 원광대 석좌교수를 방문했다. 두 사람은 21세기 사회의 이상징후와 동서양 철학교류 등에 대해 깊은 얘기를 나눴다. [배영대 기자]

한병철(53)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의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가 요즘 화제다. 너나없이 달려가는 ‘성공시대’의 강박증과 부작용을 성찰한 책이다. 한 교수가 최근 도올 김용옥(64) 원광대 석좌교수를 방문했다. 두 철학자는 동·서양의 사유를 넘나들며 현대사회의 안팎을 진단했다.

 한 교수는 고려대 금속공학과를 나왔다. 도올이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해 고려대 교수로 부임하던 1982년 당시 학부를 마치고 좀 더 큰 공부를 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30년간 국내에 거의 들어오지 않고 독일에서 박사학위와 교수자격을 취득했다. 때문에 두 사람이 만날 기회는 없었다. 언론과 책을 통해 도올을 접했던 한 교수가 이번 책이 국내 번역된 것을 계기로 도올을 찾게 됐다.

 『피로사회』는 독일에서 2010년 출간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두 철학자는 만나자마자 ‘사소한 대화’는 생략하고 곧바로 철학담론으로 들어갔다. 인사하러 간 자리가 예정에 없던 철학대담으로 이어졌다.

 한병철=안녕하세요. 이번에 한국어로 번역된 제 책을 갖고 인사차 왔습니다.

 김용옥=독일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고요.

 한=페터 슬로터다이크라고 독일에서 유명한 철학자가 총장인 대학교에서 가르칩니다. 슬로터다이크는 ‘독일의 김용옥’이라고 할 수 있지요.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강의 한 번 하면 3000명씩 모이는 등 독일 사회를 굉장히 자극하는 사람이에요. 도올 선생님은 동양사상을 서양에 알리는 노력을 하지 않으십니까.

 김=한 교수가 독일어로 『피로사회』같은 책을 쓴다는 건 독일 정신세계(German mind)로 들어가서 독일인으로서 써야 되는 거잖아요. 그래야 독일 사람한테 읽히지, 나는 『논어』 『대학』 『중용』 『효경』 같은 동방 고전 한글번역 시리즈를 내고 있어요. 『맹자 한글역주』가 곧 나옵니다. 그런데 내 책을 독일어로 번역하면 독일 사람들이 못 읽어요.

 한=독일어 잘하는 사람이 번역해도 못 읽을 겁니다. 이해가 안 되는 거죠. 동양사상을 서양에 소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양철학 얘기를 하지 않는 겁니다. 서양의 언어로 서양과 다른 사유의 상황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피로사회』를 쓰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피로사회』에서 제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게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쓸모 없는 것의 쓸모)이에요. 장자 얘기 안하고 서양작가들 이야기 하면서 결국 장자의 ‘무위’(無爲·함이 없음)나 ‘무용지용’의 의미를 전달하는 거죠.

 김=그게 유일한 통로일 거요. 한 교수는 독일어 속에 살고 있고, 나는 한국어 속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한=동양철학의 번역서를 서양인은 그들 방식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하이데거가 『도덕경』을 번역한 게 있는데 노자의 ‘Tao’(道·길)를 기독교의 ‘신’으로 연결시켜요.

 김=『도덕경』에 ‘도를 도라고 말하면 상도(常道)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 는 구절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조차 상도(常道)를 ‘영원한 도’(Eternal Tao)라고 번역해요. 영원불변이란 개념은 전통적 동양 사유와는 거리가 멉니다. 동양인에게 모든 도는 시간 속에 있는 것이거든. 시간 속에서 항상스러운 도, 항상 시간과 더불어 가는 도라는 의미지요. 이런 얘기를 내가 평생 했는데 잘 이해되지 않는 걸 보면 오늘의 한국인과 한국말이 얼마나 서양화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저는 하이데거 연구로 박사학위를, 데리다 연구로 교수자격시험을 통과한 서양철학자이고 15권 정도의 책을 독일에서 펴냈지만 늘 동양적 사유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김=동서양을 떠나서 인류의 가장 큰 과제상황은 막스 베버가 이야기했듯이 초월적 신화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희랍 사람들이 하는 대화라는 것도 거의 신화를 빌려서 하는 것 뿐이지요. 근데 공자, 맹자 이런 것은 신화가 아니란 말이야. 아주 리얼한 역사적 상황일 뿐이지. 적나라한 인간의 이야기지요. 이데아적 전제가 없어요.

 한=서양철학을 보면 현대까지 와서도 신화를 극복 못해요. 서양의 포스트 모던, 해체주의조차도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김=영국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피로(Fatigue)’ 개념을 접해본 적 있어요.

 한=어느 책에서 피로를 이야기 합니까.

 김=『이성의 기능』에서 화이트헤드는 이성을 서양 전통의 기하학적 이성이 아니라 넓은 생물학적 의미로 다시 정의합니다. 인간이 더 잘살기 위해서 하는 노력은 다 이성적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에게서 이성의 반대 개념이 피로입니다. 이 사람이 말하는 이성이란 것은 삶의 엔트로피를 줄여주는 생명의 약동같은 겁니다. 그와 반대 방향으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것이 피로라고 본 거죠.

 한=우리 사회가 이성적 사회가 아니라 피로를 생산하는 사회라는 게 제가 『피로사회』에서 하려는 말인데,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성과사회’라고도 규정하는데, 성과사회는 삶을 좋게 가꿔나가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과만 많이 내는 데 중점을 둔다는 것이지요. 지난 세기 인간을 착취하는 힘은 타인의 강제와 규율이었지만, 현대사회는 자기가 자신을 착취하는 사회로 변했다고 봅니다. 우울증은 성과사회의 질병입니다.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 시대의 질병을 극복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김=한 교수의 파워는 서양 속에서 서양의 언어로 동양철학의 의미를 해석한 데 있을 겁니다. 앞으로 더 노력해서 하이데거를 뛰어넘는 대가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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