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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막판 뒤집기는 신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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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강홍준
논설위원

40대 이상 학부모라면 자신이 학교에 다니던 시절과 지금이 몇 가지 점에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다닐 때는…”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내 아이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공부깨나 한다고 해도 이제는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들어가기 어렵다. 인서울(서울에 있는 대학)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내 때만 해도 열심히 노력해서…”라는 말을 하는 중년 남성들이 주변에 많다. 세상 물정 참 모른다. 집에서 누군가 핀잔을 안 해주나 답답할 정도다.

 중1 때 성적이 수능 성적까지 계속 이어진다. 그사이 성적 끌어올리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추세로 굳어져 가고 있다. 물론 예외는 있다. 교육업체들의 획기적인 공부법, 광고 기사에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일반화하기엔 어려움이 많은, 그래서 보통의 경험과 통계의 극단 영역에 놓여 있는 아웃라이어(outlier)라고 보는 게 맞다.

 성적의 막판 뒤집기는 우리 교육 현실에서 신화의 영역에 들어갔다. 지금 상황은 추석 연휴 경부고속도로와 같다. 차량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빚어진 정체현상이다. 편도 4차로 도로가 꽉 막혔고, 아무런 우회도로가 없는 상황이다. 막힌 길인 줄 알면서도 다른 대안이 없으니 차량들이 꾸역꾸역 몰려든다. 고향으로 가는 길은 선입선출(先入先出)이다.

 요즘 학교 교실에 가보면 누워 자는 아이들도 오후엔 학원엔 다 간다. 과거엔 한 학급 60명 중 10명은 공부하고, 10명은 어중간하고, 나머지 40명은 아예 놀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부모의 성화 때문이든,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든 대학 가겠다고 공부는 다 한다. 게다가 지금 중·고교 성적이나 기록체계는 누적적이다. 중간고사 시험 한번 잘못 보더라도 기말고사에서 만회하고, 1학년 때 안 되면 2학년 때 만회하는 일은 도무지 허용되지 않는다.

 서울의 경우 전체 성적의 30%가 수행평가나 논술·서술형 평가로 이뤄지고 있다. 전 과목에서 평소 수업 태도 점수, 보고서 등 과제물 작성 점수, 실기 테스트 점수를 매긴다. 과거처럼 시험 때 4각 연필 굴려 25% 확률로 객관식 문제의 정답을 때려 맞힐 수 있는 그런 시험이 아니다. 심지어 현 정부는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중·고교 6년간 활동 내역을 온라인상에서 족적으로 남기는 에듀팟(창의적 체험활동 기록시스템)을 시작했다.

 그러니 매사에 성실한 여학생이 얼렁뚱땅하는 남학생들을 ‘밥’으로 여기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벽돌을 하나둘씩 조심스럽게 6년간 쌓아 올린 결과물을 대학에 가져다 내는데,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와르르 무너져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처럼 모든 차량(학생)이 고속도로(입시)에 몰려 옴짝달싹 못하고, 앞차의 뒤꽁무니(누적적인 성적·기록)만 쫓아가는데 쉽사리 추월(성적 뒤집기)이 가능하겠는가.

 상황이 이렇다면 이젠 기성세대가 할 일이 있다. 우선 왕년 얘기는 이제 그만해야 한다. 숨 쉴 틈조차 없는 요즘 아이들에게 대안을 줘야 한다. 꽉 막힌 고속도로의 길을 넓히는 건 대안이라 할 수 없다. 실업계 고교(현재 특성화 고교)를 위한다면서 대입 특례 자격을 부여하는 바람에 실업계 고교생들까지 모두 대입 전선에 나서게 한 건 과거 정권의 실책이었다. 쉽지만은 않은 일이겠으나 우회도로를 만들어야 한다. 굳이 꽉 막힌 고속도로로 갈 필요 없고, 다른 길로도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게 하자는 얘기다. 그런 면에서 지난 5년간 MB 교육정책 가운데 그나마 평가해 줄만 한 건 마이스터 고교 설립과 고졸 취업 확대였다.

 어느 대학을 가느냐가 인생의 목표인가. 그건 시작일 뿐이다. 굳이 남들 다 가는 고속도로를 선택하지 않더라도 우회도로를 통해 성공을 찾을 수 있게 한다면 그게 골칫덩어리 대입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