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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멘 어깨가 아름다워 … 끈끈한 욕망 해맑은 고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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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호 17면

청년문화 시대의 포크송에서 끈적거리는 감수성을 찾기란 참 힘들다. 윤형주나 김세환의 명랑하고 해맑은 질감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수에 젖은 송창식의 목소리도 맑게 정화된 느낌을 준다. 그것은 확실히 ‘가슴 아프게’나 ‘동백 아가씨’ ‘안개 낀 장충단공원’의 끈적거림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날이 풀리고 봄이 되어 리비도가 치솟아도 이들은 끈적거림 하나도 없이 말끔하게 순수한 사랑을, 그러나 놀랍도록 솔직하게 드러냈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49> 봄날의 사랑

“가방을 둘러멘 그 어깨가 아름다워/ 옆모습 보면서 정신 없이 걷는데/ 활짝 핀 웃음이 내 발걸음 가벼웁게/ 온종일 걸어 다녀도 즐겁기만 하네/ 길가에 앉아서 얼굴 마주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 우릴 쳐다보네.”(김세환의 ‘길가에 앉아서’ 1절, 1974, 윤형주 작사·작곡)

지나가는 사람이 쳐다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길가에 주저앉아 연애를 한다. 여자는 입을 가리고 ‘호호호’ 웃는 대신 솔직하게 활짝 웃으며 자주 ‘깔깔’거린다. 여자는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숄더백을 둘러메고 활달하게 걷는다. 그 옆에서 나란히 걷던 키 큰 남자는, 가방 끈이 걸쳐져 있는 여자의 어깨를 내려다본다. 얼굴도 마음도 아니고 “어깨가 아름”답다고, 그는 육체적 욕망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버린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끈적거리지 않는다. 육체적 욕망을 감추지 않고 다 드러내 버렸기 때문이다. ‘개그콘서트’의 ‘쌍칼’처럼 “그 어깨가 이~뻐!”라고 얘기하지만, 쌍칼처럼 게슴츠레한 눈매에 느끼한 목소리로 말하지 않고 윤형주와 김세환의 명랑한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노래한다.

그러고 나니 별 게 아니다. 욕망을 감추고 음습하게 끈적거리는 것은 기성세대나 했던 유치한 짓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온종일 걸어 다녀도 즐겁기만” 하다. 물론 벌건 대낮에 손도 잡고 팔짱도 끼었으리라. “그대가 만들어준 꽃반지 끼고” 오솔길을 걸었으니(은희의 ‘꽃반지 끼고’) 서로의 손을 조물락거렸을 것이 분명하고, 밤중에 둘이 앉아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윤형주의 ‘두 개의 작은 별’)을 했으니 어깨 안고 뽀뽀도 했으련만 이 사랑의 질감은 끈적거림 없이 말끔하게 정제돼 있다.

이런 태도는 남녀불문이었다. 여자들의 내숭조차 다 드러내 버린 이 자작곡 노래의 솔직함은 놀랄 만한 정도다.

“1. 어젯밤 꿈속에서 보랏빛 새 한 마리를/ 밤이 새도록 쫓아 헤매다 잠에서 깨어났다오/ 나는 괴롭힐 사람 없는 조용한 여자/ 나는 괴롭힐 사람 없는 깔끔한 여자랍니다
2. 봄이 되어서 꽃이 피니 갈 곳이 있어야지요/ 여름이 와도 바캉스 한번 가자는 사람이 없네요/ 나는 괴롭힐 사람 없는 조용한 여자/ 나는 괴롭힐 사람 없는 얌전한 여자랍니다

3. 스물한 번 지나간 생일날 선물 한 번 못 받았고요/ 그 흔한 크리스마스 파티 한번 구경 못했다오/ 나는 괴롭힐 사람 없는 조용한 여자/ 나는 괴롭힐 사람 없는 말쑥한 여자랍니다

4. 나는 소녀가 아니고 여인 또한 아직은 아니지만/ 장발 단속엔 안 걸리니 여자는 분명 여자지요/ 나는 괴롭힐 사람 없는 조용한 여자/ 나는 괴롭힐 사람 없는 조용한 여자랍니다.”(이연실의 ‘조용한 여자’, 1975, 이연실 작사·작곡)

이 반어와 솔직함의 수준이란! 가사는 이토록 파격적으로 솔직한데 목소리는 부끄러움도 흥분도 완전히 제거된 채 천연덕스럽게 맑다.

그러나 이 시대 청년들도, 이 밝은 햇빛 같은 질감만으로는 ‘2프로’ 부족함이 느껴졌던 모양이다. 포크의 범주를 넘어서서 록으로 넘어가면 그것이 보인다. 신중현 사단이 키워낸 여자 가수들, 펄시스터즈김추자김정미는 모두 관능적 끈적거림을 노골화하여 한 시대를 휘어잡았다. 하지만 이들의 끈적거림은 너무도 도발적이어서 확실히 전 세대의 것은 아니었다.

김추자는 ‘쇼쇼쇼’에서도 파워풀하면서도 뱀 같은 관능성을 드러내 브라운관을 출렁거리게 만들었는데, 김추자가 수많은 스캔들을 뿌리며 떠난 후 ‘제2의 김추자’ 김정미는 김추자보다 훨씬 힘을 빼어 더 섹시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어데로 가고 싶나 바람 따라 가고 싶나/ 어데로 가고 싶나 바람 따라 가고 싶나/ 저 멀리 기차를 타고 갈까 저 멀리 버스를 타고 갈까/ 고속도로 달려 보네 불어라 봄바람아.”(김정미의 ‘불어라 봄바람’, 1973, 신중현 작사·작곡)

콧소리를 왕창 섞은 이 노리끼리한 목소리의 섹시함은 정말 대적할 자가 없다. 그의 최고 히트곡 ‘바람’은 귓가에서 속살거리는 화사(花蛇)의 혀 같다. 하긴 리비도란 언제나 억압의 측면이 존재하는 법이니, 어찌 늘 청명하고 순수할 수만 있겠는가. 이렇게 달착지근한 봄바람이 오감을 건드리는데!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 대중가요 관련 저서로『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광화문 연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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