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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경제] 파워 중견기업인 … 이희상 운산그룹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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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밀가루와 페라리.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런데 운산그룹 이희상(66) 회장은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고객을 즐겁게 하는…. 밀가루와 페라리는 모두 이 회장이 운영하는 품목들이다. 밀가루는 운산그룹의 주력사업이다. 페라리는 자회사인 FMK를 통해 수입 판매한다. 또 페라리는 세상에서 제일 비싸고 고급 브랜드의 밀가루를 만들겠다는 운산그룹의 벤치마킹 대상이기도 하다. 운산그룹은 밀가루를 만드는 동아원을 필두로 식품·와인·사료 등 23개 계열사를 두고 있다. 역시 언뜻 생각하면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업 포트폴리오다. 하지만 이 회장은 “모두 누군가를 즐겁게 하는 사업”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했다. 그는 “남을 괴롭게 하는 사업은 절대 안 한다. 고객을 감동시키는 게 아니라 아예 기절시킬 정도의 만족을 주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No.1 … 매출 1조원’의 꿈

국내 중견기업을 대표하는 운산그룹의 이희상 회장이 충남 당진 동아원 공장 1층 로비에 전시돼 있는 밀을 분쇄하는 롤러 밀 위에 앉아 있다. 그는 “당진에서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고급 브랜드의 밀가루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운산그룹은 2015년까지 매출 1조원대의 작지만 강한 기업이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사진=최승식 기자]

이 회장은 항상 재킷 왼쪽 깃에 ‘+1’ 모양의 동아원 배지를 꽂고 다닌다. 숫자 1에는 2015년까지 ‘그룹 매출 1조원, 사업별 업계 1위’를 달성하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다. 운산그룹의 지난해 매출액은 8300억원. 이 회장은 “매출 1조원은 모든 중견기업의 꿈”이라며 “1조원을 돌파해야 웬만한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매출 1조원을 유달리 강조하는 것은 최근 2~3년간 ‘이름 없는 중견기업’으로서 겪은 서러움과 냉대 때문이다. 동아원은 당초 전북 군산에 있던 공장을 정부의 요청을 받고 목포로 이전했다. 하지만 다시 목포시의 강요에 못 이겨 쫓겨나듯 짐을 싸 당진으로 옮겨야 했다. 그는 “정부 요청으로 옮긴 본사를 지방자치단체가 다시 쫓아낸 것”이라며 “힘센 대기업이었으면 그리 쉽게 내쫓았겠느냐”고 반문했다.

 동아원은 이 회장의 부친인 고 이용구 회장이 1956년 군산에 설립한 호남제분이 모태다. 호남제분은 전남에도 기업이 있어야 한다는 정부 요청에 따라 1969년 목포에 제 2공장을 설립했다. 삼학도의 공유수면 매립권을 양도받아 부지 매립과 정지작업을 거쳐 공장을 지었다. 지역민과의 상생경영으로 사세가 확장되자 1974년에는 군산공장을 폐쇄하고 본사를 아예 목포로 옮겼다. 호남제분은 1990년대 초 전국 시장 공략을 목표로 회사 이름을 한국제분으로 바꿨다.

 하지만 목포시가 2000년 초 삼학도 복원사업을 발표하면서 목포의 향토기업 한국제분은 갈 곳 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 회장은 “삼학도 복원을 내건 목포시가 한국제분이 이전 부지를 물색할 시간도 주지 않고 헐값의 보상금만 쳐준 채 내몰았다”고 회고했다. “외환위기를 이겨내고 막 안정기에 접어들었나 싶었는데 갑자기 벼랑 끝으로 내몰렸던 순간”이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대학 졸업 후 미국에 나가 해외시장 개척에 몰두하던 중 갑작스레 경영권을 승계했다. 1993년 4월 부친이 세상을 등졌고, 7월에는 부친의 뒤를 이어 회사를 운영하던 동생마저 항공기 추락 사고로 숨지는 불상사가 겹쳤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서울 논현동 사무소로 목포 시민단체가 하루가 멀다 하고 몰려왔다”며 “수천 평의 공장 터를 찾아야 하는데 빨리 나가라며 숨돌릴 틈도 주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공장이 강제 퇴거될 위기에서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신동아그룹이 해체되면서 매물로 나온 동아제분을 인수해 덩치를 키워 시장점유율 28%로 제분업계 1위에 올라선 것이다. 동시에 동아제분의 인천공장과 한국제분의 목포공장을 합치기로 하고 충남 당진에 최첨단 제분 공장을 착공했다.

마침내 지난해 말 밀가루를 만드는 공정과정을 자동화하고 반도체 공장 못지않게 먼지 하나 허투루 들어올 수 없는 최첨단 공장을 완공했다. 또 다른 공장보다 하나 더 긴 분쇄과정과 분류과정 라인을 설치해 업계 최고 품질의 100여 종에 달하는 밀가루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

 한국·동아제분으로 부르던 기업 이름도 동아원으로 바꿨다. 내친김에 두 회사가 제각각이던 기업이미지(CI) 역시 ‘+1’으로 변경했다. 이 회장은 “+1은 단순히 1조, 1위만 의미하는 건 아니다. 남보다 하나 더 생각하고 하나 더 실행하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1등은 입으로 외친다고 이뤄지지 않는다”며 “항상 만족하기보다 부족한 조그만 것 하나를 더 채워야 1위가 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CI 통일에 이어 어디든지 내세울 만한 브랜드를 만드는 데 몰두하고 있다. 동아원은 4년 전 밀가루 소비자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맥선(麥仙)’이란 브랜드를 선보였다. 그동안은 주로 대형 식품회사에 밀가루를 납품했지만 가정용으로 작게 포장한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 시장에 출시한 것이다.

이 회장은 “생각만큼 맥선이 잘 알려지지 않는다”며 “큰 기업처럼 막대한 마케팅비나 빅모델을 쓸 수 없어 더 어렵다”고 했다. 여느 중견기업과 마찬가지로 신성장동력 개발 역시 만만치 않다. 커다란 시장은 이미 대기업이 똬리를 틀고 있는 레드오션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작은 시장에 진입할 경우 덩치가 산만하게 커진 기업이 중소기업 영역을 침범한다는 비난에 시달리기 십상이다. 이 회장은 “중견기업은 그래서 남들과 경쟁하지 않는 시장, 남들이 가지 않는 시장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No 대신 Yes라고 말한다”

청와대에서는 올 1월 중순 중견기업인이 참석한 ‘대통령과 중견기업인의 대화’가 열렸다. 중견기업인은 당시 “중소기업을 졸업한 뒤 세제·고용 등 각종 지원은 줄고 대기업들과 무한경쟁에 내몰려 경영에 어려움이 많다”고 호소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부가 중견기업의 금융 및 인력 지원을 전담하는 기구의 필요성을 검토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 자리는 사실상 이 회장이 1월 초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청와대도 중견기업인은 부르지 않더라”라고 지적한 뒤 만들어진 자리였다. 하지만 이 회장은 “당초 청와대 오찬 참석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더라”고 했다. 그는 대한상공회의소 산하 중견기업인협회의 회장을 연임하며 중견기업의 대변자 노릇을 자임해 왔다. “중견기업이 잘 커야 우리 경제가 건강해진다”는 소신 때문이다.

이 회장은 “청와대 만찬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 지식경제부의 연락을 받고 참석했다”며 “하지만 만찬장에서 난 블랙리스트에 올랐는지 마이크(발언 기회)도 안 주더라”며 허탈해했다. 그는 “정부에 대고 쓴소리를 했지만 난 늘 긍정적인 걸 좋아한다”며 “청와대가 중견기업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 것도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천성적으로 노(No)라는 말을 못하고 항상 예스(Yes)가 몸에 배어 있다고 한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항상 노보다는 예스란 말만 쓴다고 했다. 집에서는 아예 가족들 사이에 ‘예스맨’으로 불린다. 이 회장은 “예스라고 말하면 항상 좋은 일이 생긴다. 그래서 애들한테도 노는 안 가르치고 예스만 가르쳤다”고 했다.

이 회장은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고 있는데, 자녀 교육에서 가장 신경 쓴 게 긍정 마인드 교육이다. 이 회장 부인 정영화(66)씨는 “남편은 친구한테든 애들한테든 정말로 거절을 못한다. 나랑 결혼한 것도 아마 시부모님이 시키니까 예스한 모양”이라며 웃었다.

 부부는 이 회장이 미국 지사 근무를 앞두고 집안의 중매로 처음 만난 지 한 달 만에 약혼했고, 다시 한 달 만에 결혼했다. 두 딸 역시 중매로 결혼했다. 부부는 서른 줄에 접어든 아들까지 중매결혼을 시킬 요량이다. 부부는 간혹 부부싸움을 할 때도 자녀들을 재운 뒤 밤 12시가 넘어 안방 문을 걸어 잠그고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다퉜다고 한다. 예스맨인 남편이 부인에겐 행복하기만 했을까. “결혼 초기 남편이 말을 돌려서 하는데 알아듣지 못해 아주 답답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며 “나중에 알고 보니 싫은 걸 그대로 말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돌리고 돌려서 말해 내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란 답이 돌아왔다.

 이 회장의 예스, 긍정 마인드는 기업 경영에도 그대로 배어 있다. 그는 간부들과 회의할 때도 경영 현안을 따지기보다 경영인의 긍정적인 자세를 먼저 강조하곤 한다. 경영자의 부정적인 생각은 어떤 경우든 득보다 실로 연결되기 쉽다. 또 스스로의 성장을 저하시키는 건 물론 조직원과 기업의 성장과 발전에도 저해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회장의 이 같은 경영 마인드는 동아원의 포트폴리오에도 그대로 담겨 있다. 핵심 사업인 밀가루는 국수나 빵 같은 먹거리로 가족을 즐겁게 하고, 와인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유기농·친환경 식품 등으로 사업을 확장한 것도 자연과 사람 모두에게 긍정적인 분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괴롭게 하고 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절대 손대지 않는다. 이 회장은 “우리 회사가 예전엔 농약도 만들었다”며 “하지만 현재 농약사업은 접었다”고 말했다. 농약은 소비자가 꺼리고 농민을 힘들게 한다는 것이 사업을 중단한 이유다. 그는 “우리가 돈을 많이 벌려면 농민이 약을 쳐도 태풍이나 집중호우로 날아가 또 써야 한다”며 “우리 돈 벌자고 농민들 괴로워하는 걸 달가워해서야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회장은 긍정 마인드를 연마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명상을 한다. 요즘엔 젊은 직원들에게 직접 긍정 마인드를 전파하기 위해 카카오톡과 페이스북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그는 “젊은 사람들과 소통하려면 그 사람들 방식을 따라야 한다. 그래야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예스 철학도 펼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일 그리고 와인·테니스·국악

‘고객 기절시키겠다’ 집념으로 만든 와인…미국 나파밸리 옥션서 최고가 낙찰 이변

이희상 회장은 국내 와인문화전파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의 주요 와인 산지인 메도크·생테밀리옹·부르고뉴·샴페인 등 네 곳의 와인 명예기사단에 임명됐다. 메도크의 기사단에 임명된 직후 기념사진.

지난달 말 미국에서 열린 나파밸리 프리미엄급 와인 옥션에서는 작은 이변이 일어났다. 미국이 아닌 해외 업체가 운영하는 와이너리의 와인이, 쟁쟁한 현지 와이너리들이 출품한 190여 종의 와인을 모두 제치고 최고가에 팔린 것이다.

주인공은 이희상 회장이 2005년 나파밸리의 포도원을 인수해 설립한 다나 와이너리. 이곳이 출품한 2010년산 카베르네 소비뇽이 병당 1167달러(약 130만원)의 최고가로 낙찰받았다.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와인업계에서 신생 와이너리가 생산한 와인이 이처럼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1996년 시작된 나파밸리 프리미엄급 와인 옥션은 미국 내 와인 유통업자를 비롯해 전 세계 수입사, 음식업 관계자 등 1000여 명이 참석한다. 이 회장은 “나파밸리 옥션에서 우리 와인이 최고가를 기록한 건 와인업계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것”이라며 “최선을 다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들이 안 하는 특별한 하나를 더 한 결과”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회장의 와인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운산그룹의 와인 수입과 전문 매장 사업의 역사가 그대로 국내 와인 시장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70년 초 미국에서 호남제분의 현지 법인인 유원의 대표로 일하며 와인과 인연을 맺었다. 와인이 수입허가 품목에서 해제된 96년 수입사인 대산물산을 차려 와인사업에 본격 진출했다. 이듬해에는 미국·호주·칠레 등 신대륙을 비롯해 프랑스·이탈리아 와인을 수입하는 나라식품을 차렸다. 또 미국 나파밸리에 직접 다나 와이너리를 설립하기도 했다. 다나 와이너리는 설립 4년 만인 2009년에 로터스 빈야드 카베르네 소비뇽(2007년산)으로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로부터 100점 만점을 받기도 했다.

 이 회장은 “와인은 단순한 술이 아닌 문화”라는 철칙을 갖고 있다.

이 회장은 또 “와인은 누구나 좋은 사람과 쉽게 마실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이 때문일까. 나라식품이 2000년대 초반부터 수입하고 있는 칠레의 대표적인 와인 몬테스 알파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와인으로 꼽히면서 부동의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다.

이 회장은 고운 피부와 날렵한 체격으로 나이에 비해 젊게 보인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청년 시절부터 꾸준히 쳐온 테니스와 미국에서 인연을 맺은 와인, 경영에 입문한 뒤 심취한 국악(國樂)이 비결이다.

 테니스는 1963년 미국 유학 시절부터 스스로 학비를 벌기 위해 테니스 코치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전국체육대회 대표선수로 나갔을 만큼 실력이 프로급이다. 최근엔 주로 경기고 시절 친구들의 테니스 모임인 화동회 멤버들이나 사위들과 게임을 즐긴다. 이 회장은 “테니스는 상대방이 어느 포인트로 이동할지를 미리 분석해 빠르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항상 파트너가 있는 경영에도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승부 근성이 테니스로 다져진 것 같다고 말한다.

 또 들을수록 진한 감동을 안겨주는 국악에도 심취해 있다. 전통국악에만 국한되지 않고 퓨전국악까지 다채롭게 즐긴다. 특히 풀무원·샘표식품·삼양밀맥스 등 식품업계 지인들과 ‘국생사’(국악을 생각하는 사람들)라는 모임을 만들어 국악 대중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국생사는 2004년부터 매년 ‘국악사랑 해설음악회’를 후원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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