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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이남 한인에겐 ‘정의부’가 정부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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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호 26면

정의부 중앙행정위원회가 있던 유하현 삼원보. 망국 직후부터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일제와 장작림 군벌정권의 탄압으로 정의부는 근거지를 계속 옮겨야 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일반 국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23년 1월 3일부터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의 판도를 바꿀 만한 큰 사건이었다. 3·1운동 이후 곧 독립이 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었지만 3·1운동의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다. 모든 독립운동 세력이 망라되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였고, 상해에 위치해 무장투쟁에 상대적으로 소홀한 것도 문제였다.

이덕일의 근대를 말하다-대한만주의 삼부(三府)⑦임정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

그래서 미주에서 활동하던 박용만(朴容萬)은 북경으로 건너와 국내외에 산재한 10개 독립운동 단체를 규합해 1921년 4월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했다. 군사통일회의는 대체로 임정에 부정적이었다. 회의 자체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임정에는 큰 과제를 던져주었다. 모든 독립운동 단체가 참가하는 ‘통일전선체’를 결성하라는 과제였다. 이런 여망 속에서 1923년 1월부터 국민대표회의가 열린 것이었다. 국민대표회의는 국내와 상해, 북경, 만주, 러시아령, 미주의 120여 개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가 총망라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통일적인 조직체가 건설된다면 그동안 분산되었던 여러 독립운동 세력들이 하나의 깃발 아래 보다 통일적이고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회의는 처음부터 임시정부를 개조해서 존속시키자는 개조파(改造派)와 임정을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자는 창조파(創造派)로 나뉘어 대립했다. 만주와 상해의 대표들은 대체로 개조를 주장한 반면, 북경과 시베리아 대표들은 창조를 주장했다. 대립이 계속되자 5월 15일 국민대표회의 의장이었던 김동삼(金東三)을 비롯해 김형식(金衡植)·이진산(李震山) 등 만주 대표들은 대표 사면청원서를 제출하고 만주로 돌아갔다. 창조파는 6월 3일부터 윤해(尹海)를 의장에 추대하고 단독 회의를 열어 국호를 한(韓), 연호를 단군 기원으로 삼는 새로운 한국(韓國)정부를 창조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

1 삼원포(옛 삼원보) 동명소학교. 아직도 동명학교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2 정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이었던 정이형. 해방 후 남조선과도입법의회 관선의원이 돼 친일파의 공민권 제한을 주장했다.

그런데 김구가 '백범일지'에서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원으로 상해에서 개최한 국민대표회의”라고 말한 것처럼 대회 경비는 러시아 정부에서 나온 것이었다. 러시아는 민족단일전선을 만들어 항일투쟁에 나서라는 뜻에서 지원한 것이었지 한 파벌만으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라는 의도는 아니었다. 러시아 정부가 창조파를 추방하면서 새로운 정부는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한국독립사' 4권, 임시정부사).

만주로 돌아간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지역 내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 작업에 나서서 1924년 7월 ‘전만(全滿)통일회의 주비회(籌備會)’를 결성했다. 주비회에는 대한광정단(大韓光正團:대표 김호), 대한독립군(대표:이장녕), 대한독립군단(대표:윤각) 등이 가담했는데 그 중심은 대한통의부와 서로군정서였다. 이때 대한독립군이 임정 옹호를 주장하자 통의부 등에서 극력 반대하면서 다시 갈등이 발생했다. 통의부에서 갈라져 나간 군부 세력이 임정 산하의 육군주만참의부(약칭 참의부)를 결성했으므로 통의부는 임정에 적대적이었다. 결국 대한독립단과 학우회 등이 탈퇴하고 나머지 8개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화전현(樺甸縣)에서 전만통일회를 열고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했다.

1924년 11월 24일을 창립기념일로 삼은 정의부는 창립 결의문에서 ‘개국 기원(紀元:단군 기원)을 연호로 사용하고 구(區)의회, 지방의회, 중앙의회를 설치’했다. 또한 ‘각 단체는 명의 취소 성명서를 작성해 대표가 연서해서 공포하고, 각 단의 사무는 폐회일로부터 2개월 이내에 정의부로 인계한다’는 내용을 결정했다(채영국,'정의부 연구', 1998, 박사학위 논문). 이 결의에 따라 서로군정서는 1924년 12월 31일 가장 먼저 통합 선포문을 발표하고 해산했다. 서로군정서가 선포문에서 “오직 우리 독립운동의 유일무이한 정의부라는 기관을 조직한 후 헌법 전문을 새로이 준비한다”고 밝혔듯이 정의부는 군정부(軍政府)를 지향했다.

정의부는 하얼빈 이남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대표 기관을 자임했는데 입법·사법·행정의 3권이 분립된 민주공화제였다. 법률 제정권은 의회에 있었고, 중앙행정위원회(행정부) 산하에 민사·군사·법무·학무·재무·교통·생계(生計)·외무 등 8개 부서를 두었으며, 사법부에 해당하는 사판소(査判所)가 있었다.
지방은 촌락의 크기에 따라 ‘중앙→총관구(總管區:1000호)→지방(地方:500호)→백가장(百家長:100호)→구(區:50호)→십가장(十家長:10호)’ 등으로 나누고 지방자치제를 실시했다. ‘지방’이나 ‘구’에서 호수(戶數)를 비율로 중앙의회 의원을 선출하면, 의원들은 재만(在滿) 한인사회에 신망이 높은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중앙행정위원회 위원들을 선임했다. 선출된 위원들은 위원장 및 각 부 위원을 상호 투표로 선출했다. 민주공화제를 운영한 경험이 전무했던 상황에서는 경탄할 만한 민주적 조직 운영 방식이었다.

정의부는 초대 중앙집행위원장에 이탁(李<6CB0>)을, 현정경(玄正卿)·지용기(池龍起)·이진산(李震山)·김용대(金容大)·김이대(金履大)·윤병용(尹秉庸)·오동진(吳東振)·김동삼(金東三) 등을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했다. 만주 독립운동의 대표격인 이상룡(李相龍)이 빠진 이유는 이미 만 66세의 고령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들 이준형(李濬衡)은 선부군 유사(先府君遺事)에서 ‘국민대표회의의 결렬에 실망해서 반석(盤石) 동쪽 호란하(呼蘭河)가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참의부가 군사 중심의 조직체라면 정의부는 행정과 군사 병행 체제였다. 정의부는 창립 선언서에서 “…광복사업의 근본 문제인 경제 기초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산업 진흥을 시도하며 민족발달의 유일한 요소인 지식 정도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교육 보급을 실시한다”고 선언했듯이 산업 부흥과 교육 우선, 그리고 무장투쟁을 병행했다.
정의부는 양기탁(梁起鐸)의 주도로 만주 여러 곳에 수전(水田)농업을 하는 ‘이상적 농촌 건설 계획’ 등을 계획했지만 토지 구입대금을 마련하지 못해 실패했다. 정의부 학무국은 1925년 소학(小學)·중학(中學)·여자고등·직업·사범학교 등으로 구성되는 학제를 발표하면서 소학교 의무교육 제도를 선포했다. 정의부는 각지에 설립되어 운영 중인 학교를 인가하기도 하고 새로 설립하기도 했다.

정의부 본부가 있던 유하현 삼원보의 동명중학교를 필두로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의 화흥(化興)중학과 남만주학원 등을 설립했으며, 그 외에 화성(華成)의숙, 부흥(復興)학교, 삼흥(三興)학교 등도 모두 정의부에서 운영했던 학교였다. 일제는 1920년대 후반 정의부에서 22개 학교를 경영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1932년 숭실전문학교 경제학연구실의 이훈구(李勳求)는 이보다 2~3배 이상 많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1925년 6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宮松)와 장작림(張作霖) 군벌정권의 경무국장 우진(于珍)이 ‘삼시협약(三矢協約:미쓰야협약)’을 체결하면서 중국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총독부에 넘겼다. 그래서 처음 삼원보에 중앙행정위원회를 두었던 정의부는 계속 이주해야 했다. 삼원보에서 화전현(樺甸縣) 공랑두(公郞頭)와 밀십합(密什哈)으로, 다시 길림현 대차(大<5C94>)와 신안둔(新安屯) 등으로 계속 옮겨간 것이다.

정의부는 산하에 의용군 사령부가 있었는데, 1925년 9월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司令長)은 한말 무관학교와 일본 육사 출신의 지청천(池靑天)이었다. 압록강 대안에 있던 참의부보다 더 북쪽에 자리 잡은 정의부도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다. 마지막 황제 순종의 인산일인 1926년 6월 10일에는 2개 대의 유격대를 국내로 잠입시켜 서울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려고 했다. 비록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 때문에 만주로 퇴각했지만 여건만 허락하면 다시 진입할 수 있었다.

정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이었던 정이형은 1927년 만주에서 체포되어 해방 때까지 18년 동안 장기 복역한다. 그의 혐의 중 하나는 참의부 독립군이 평북 초산(楚山)경찰서에게 당한 고마령 참변에 대한 보복 투쟁이었다. 일제 신문조서는 ‘정이형이 김석하(金錫夏), 김정호(金正浩) 등 의용군 간부들과 다수의 독립단원이 초산경찰서 경찰관에게 피살된 일을 복수하기 위해 초산경찰서 추목(楸木)출장소(김석하)와 외연(外淵)출장소(김정호), 벽동(碧潼)경찰서 여해(如海)출장소를 각각 습격했다’고 판결했다. 정이형은 6명의 의용군과 함께 1925년 3월 19일 압록강을 건너 새벽 5, 6시쯤 여해경찰관 출장소를 습격해 순사 서천융길(西川隆吉)과 임무(林茂)·신현택(申鉉澤)의 두부를 저격해 즉사시키고 다수를 부상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정의부는 전 만주를 아우르지는 못했지만 이상룡의 손부(孫婦)인 허은(許銀)이 “그렇게 조직적으로 운영해 나가는 단체 덕을 보았지 안 본 사람 어디 있나? 그 너른 천지에 자력으로 어디 가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겠나?”라고 말한 것처럼 재만 교포들에게는 사실상의 정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