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한국은행 ‘금리의 덫’에 빠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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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금리의 덫’에 빠졌다. 어제 3·25%의 기준금리를 9개월째 동결했다. 성장과 안정 사이에서 옴쭉달싹못하고 있다. 어찌 보면 한은의 고뇌 어린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물가는 3%대로 내려왔지만 유가 상승과 수출 둔화, 불투명한 경기 향방까지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은 스스로 무기력(無氣力)한 금리정책을 부른 측면이 크다. 이런 민망함 때문인지, 한은도 기존의 금리 정상화(인상) 주장을 접고 “금리 동결도 중요한 통화정책의 하나”라며 말을 바꾸고 있다.

 한은은 기준금리 인상 타이밍부터 너무 늦게 잡았다. 2010년 1분기에 실질경제(GDP) 성장률이 전년 동기 대비 8.1%에 이르렀다. 출구전략 주문이 빗발쳤지만, 한은은 7월에야 처음 기준금리를 올렸다. 그해 가을의 G20 재무장관·정상회의의 의장국이란 점을 너무 의식한 것도 문제였다. 경제가 2분기 연속 잠재성장률(4%대 초반)을 크게 웃도는 7~8% 성장을 이어가는데도, 국제적 체면에 얽매여 기준금리를 4개월간 방치해 버렸다. 만약 기준금리 인상 시기를 그해 봄으로 앞당기고, 연말까지 0.25%포인트씩 두 번쯤 더 올렸더라면 지금 금리정책을 펼 공간은 훨씬 넓어졌을 것이다.

 청와대가 한은의 위상을 제약한 것도 자충수(自充手)였다. 금통위원 한 자리가 빈 것도 벌써 2년이 다 돼간다. 수차례 금통위원 추천이 올라갔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국제 금융시장에 정통한 외국 전문가를 데려오라”며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당국이 접촉한 해외 인사들은 대부분 주택과 학교 문제로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이렇게 공석이 장기화되면서 다음달에는 금통위원 7명 중 5명을 한꺼번에 교체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통화정책의 연속성이 흔들리는 사태를 자초한 셈이다. 세계적으로 중앙은행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유럽·일본의 중앙은행은 최전방의 소방수로 나서고 있다. 한은이 지금처럼 무기력해선 안 된다. 중앙은행다운 위상을 스스로 회복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