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심재학, 북치고 장구치고

중앙일보

입력

‘북치고 장구치고’

현대 유니콘스는 외야수 심재학의 공수에 걸친 맹활약으로 대구에서 벌어진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도 삼성 라이온즈에게 승리하여 3연승을 구가, 마지막 1승을 남겨 놓았다.

심재학은 1회초 2사 1,3루 상황에서 라이온즈의 선발 투수 가르시아를 무려 13구까지 던지게 하는 근성을 보이더니 슬라이더를 받아 쳐 결국 우측 담장을 맞추는 2 루타로 2타점을 올렸다.

또한 외야수로서는 두산 베어스의 심정수와 함께 국내 최고의 강견(强肩)을 자랑하는 심재학은 정확하고 빠른 송구로 2번이나 상대 주자를 3루에서 아웃시키며 팀이 플레이오프에서 3연승 하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6회 말 1사 1루 상황에서 심재학은 진갑용의 우전안타를 잡아 원바운드로 3루로 정확하게 송구하여 주자 김한수를 깨끗하게 잡아내었다.

7회 말 에서도 역시 1사1루 위기에서 이승엽이 친 빠른 우전안타를 잡아 이번에는 바운드 없이 직접 송구하여 주자인 정경배를 3루수 퀸란이 기다리면서 태그할 정도로 잡아내어 추격의 의지를 불태우던 라이온즈 벤치와 선수들을 고개 숙이게 만들었다.

라이온즈는 이 2번의 주루사로 역전까지 갈 수 있는 분위기를 놓쳐 버려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 1학년 때부터 당당히 주전자리를 꿰찬 심재학은 당시 최고의 홈런타자였고 또한 정확한 타격을 자랑했다. 4학년 때 동기인 조경환(롯데 자이언츠)에게 홈런왕 자리를 물러 줬으나 그의 이름은 타 팀 투수들에게는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1994년 가을 당연하게도 LG 트윈스에게 1차 지명을 받았고 또한 그 해 가을과 이듬해 겨울을 뜨겁게 달구었던 현대 전자의 무차별적인 스카우트 공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프로로 입단을 일찍이 선언하며 2억원으로 당시 야수 최고의 계약금으로 입단하였다.

그가 입단할 당시 타자 중 뚜렷한 스타가 없었고 장타력이 부족하던 팀에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입단했으나 뚜렷한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팀의 4번 타자로는 다른팀에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성적을 남겼다.

여기에 1998년 말 당시 최종준 단장과 천보성 감독의 권유로 투수로 전향을 했으나 1999년 시즌 3승(3 패)만을 기록하여 안팎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다 현대 유니콘스의 투수 안병원과 트레이드 되어 둥지를 새로 틀었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트레이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관계로 그의 트레이드는 곧 방출로 해석이 되었다. 영원한 트윈스맨이 되고 싶었고 또한 미스터 LG 로 불리고 싶었던 심재학에게는 충격이 적지 않았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살고 있는 집이 불에 타 정신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심재학은 물러 설 수 없었다. 그 동안 약점으로 지적되었던 타격폼을 일부 수정하고 꾸준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파워를 늘여 나갔다. 여기에는 트윈스에서 같이 온 김용달 코치의 도움이 컸다.

동계훈련 때 김재박 감독 눈에 쏙 든 심재학은 올 시즌 시작하자 마자 주전자리를 놓치지 않더니 시즌 초 26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벌여 그의 부활을 예고했다.

그러나 시즌을 마치고 난 뒤 그의 성적은 130 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265( 430타수 114안타) 홈런 21개, 타점 75점으로, 데뷔 후 처음으로 홈런이20개를 넘는 데 위안을 삼아야 했다.

지난 겨울 타자로의 정상적인 동계훈련을 완전히 소화해 내지 못해 여름에 체력이 떨어진 것이 성적 추락의 가장 큰 이유였다.

시드니 올림픽 브레이크 동안 체력을 재충전하는 데 성공했던 심재학은 유난히 플레이오프를 기다려 왔다. 반드시 명예회복을 하겠다는 다짐의 다짐을 했다. 그리고는 3차전에서 팀이 승리하는 데 가장 큰 수훈을 세웠다.

아직도 심재학은 가야할 길이 있다. 당장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데 큰 몫을 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 또한 내년부터 아마시절의 최고타자 심재학은 프로에서도 최고라는 평가를 받을 작정이다.

※ 신종학 - 프로야구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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