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식의 터치다운] 태양은 내일도 떠오른다

중앙일보

입력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법.
지난 14일은 LA의 양대명문이 나란히 지옥으로 동반추락한 ‘블랙 새터데이’였다.

고향팀인 사립 남가주대(USC) 트로잔스와 주립 UCLA 브루인스는 또다시 약속이나 한듯 이날 오리건·UC 버클리에 각각 덜미를 잡히며 새천년 풋볼 시즌을 사실상 망치고 말았다.
이들의 뉴밀레니엄 목표는 지난달초 이후 다음과 같이 자꾸 변경됐다.

전국챔피언 등극→로즈보울 우승→마이너 보울 진출→5할 승률 확보(최후의 마지노선).
여느 학교처럼 높여잡기는 커녕 면피주의에 급급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바로 1위를 향해 뛰던 선두주자 신세에서 탈꼴찌에 여념이 없는 무기력증 환자의 처량한 모습이다.

먼저 ‘트로이 군단’을 보자. USC 트로잔스는 오리건 덕스에 17-28로 역전패하며 최근 3연패, 서부지구 퍼시픽-10(팩텐) 컨퍼런스 최하위로 추락했다.

지역언론 LA타임스와 팍스TV에 따르면 “마치 마취제에 홀린 집단 같다. 잦은 실수 반복은 물론, 지지 말아야 할 약체팀에 나가 떨어지는등 과거 선배들이 일군 업적을 후배들이 모독하는 실정”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특히 폴 해킷 USC 헤드코치가 4쿼터 종료 6분을 남기고 2야드가 남은 상황에서 4번째 공격을 시도하지 않고 펀트킥으로 공격권을 넘겨준뒤 수비에 임한 소극적 전술이 집중적으로 비난받고 있다. 결과적으로 팀 사기를 떨어뜨리고 잘 나가던 분위기를 냉각시킨 대표적인 작전착오로 판명됐다.

LA지역의 넘버원 풋볼학교로 불리는 USC가 리그 꼴찌로 추락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3년전인 1957년 이후 처음있는 일이다. 이같이 변덕스런 변신은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팀에 안겨주기에 이르렀다. 10만명 수용의 LA메모리얼 콜로세움 경기장은 지난해 이후 대부분 6만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초라한 관중이 입장하며 팬들의 분노를 잘 드러내고 있다.

시즌 개막 한달반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목표가 좌절된, 허전하기만 한 2000년.

사흘전 경기직후 라커룸에서 만난 USC 쿼터백 카슨 파머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고교 최고의 쿼터백으로 원대한 꿈을 안고 USC입학을 결정한 그는 자신의 부진으로 팀이 와해되는 장면을 목격하는 일이 무엇보다 괴로운듯 싶었다. 그래도 “이제 시즌의 절반이 끝났을 뿐이다. 남은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면 7할대 승률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UCLA의 경우는 더욱 어이가 없다. 컨퍼런스 최하위이자 올시즌 1승밖에 올리지 못한 ‘UC형님’ 버클리에 3번의 연장전끝에 38-46으로 무너져 컨포런스 1승2패로 USC에 이어 9위로 떨어진 것. 지난달 전국랭킹 3위의 팀들을 연거푸 꺾은 모습이라고는 볼수 없는 난조이다.

어차피 20세기의 마지막인 뉴밀레니엄 시즌은 다음달 막을 내린다. 이제부터는 21세기의 첫 시즌을 대비하는 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매년 로즈보울에 나가고 매년 전국챔피언 결정전을 가질수 있는 것도 아니다. 최선 다음엔 차선의 목표를 향해 끝까지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야말로 아마추어 학생스포츠의 자세인 것이다. 태양은 내일도 떠오르는 법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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