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통령은 여신전문업법에 거부권 행사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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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국회가 여신금융전문업법(여전법) 개정안을 원안 그대로 통과시킨 것은 입법권의 남용이다. 카드 수수료를 정할 때 부당한 차별을 막고, 수수료를 줄여 보자는 취지는 나무랄 데 없다. 하지만 그 방법이 문제다. 특히 “중소 신용카드 가맹점에 대해 금융위원회가 정하는 우대수수료율을 적용해야 한다”는 18조3의 제3항은 나라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독소(毒素) 조항이다. 명백히 시장원리를 침해하고 헌법 정신을 훼손하는 내용이다. 정부가 가격을 정하고, 이를 ‘적용해야 한다’고 강제하는 법률은 전쟁 때나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하곤 유례를 찾기 어렵다.

 새 여전법은 최근 영세사업자와 카드사들의 힘겨루기 산물이다. 국회 법사위 전문위원조차 “시장 자율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경고한 법안이다. 그럼에도 여야가 제대로 된 논의조차 하지 않은 채 원안을 통과시킨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어느 쪽 표가 더 많은지만 저울질한, 오로지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은 아닌가. 똑같은 논리라면 앞으로 사회적 논란이 반복될 주유소 기름값이나 휴대전화 요금도 정부에 가격통제권을 주겠다는 뜻인가. 나아가 은행에서 돈을 빌릴 때도 신용등급에 관계없이 똑같은 우대금리를 적용하라고 강제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전형적인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새 여전법의 시행까지 아직 9개월이 남았다. 그때까지 근본적인 손질이 필요하다. 카드업계는 헌법소원을 시사하고 있지만, 헌재 결정이 나오기까지 너무 긴 시간이 남아 있다. 우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하나의 방법이다. 청와대가 “부작용을 줄이는 대체입법을 검토하겠다”는 것은 지나치게 소극적인 입장이다. 우리 헌법은 국회의 법률제정권 남용을 견제하기 위해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주고 있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재의결할지는 정치권에 맡길 일이다.

 만약 여야가 여전법의 문제점을 뒤늦게 깨닫는다면 정면충돌을 피할 길은 열려 있다. 4월 총선이 끝난 뒤 19대 국회에서 여전법을 재개정(再改定)하는 것이다. 실제로 여전법 원안 통과는 정상적 절차를 건너뛴 성급한 결정이다. 현재 카드 수수료 체계 개편에 대한 전문기관의 연구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3월 말까지 용역 결과가 나오고, 4월에 카드사와 가맹점이 참가하는 공청회를 열어, 그 결과에 따라 여전법을 재개정하는 것이 올바른 수순으로 보인다.

 18대 국회는 마지막까지 우리 사회의 기대와 어긋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국방개혁안이나 약사법 개정안 등 우리의 안보와 실생활에 필요한 법안은 전혀 손대지 않은 채 넘어갔다. 이에 비해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나 다름없는 국회 의석수 늘리기와, 표만 의식한 여전법 개정안은 뻔뻔하게 밀어붙였다. 어쩌면 이처럼 꼭 처리해야 할 법안은 쏙 빼고, 폐기해야 할 악법(惡法)만 골라서 통과시키는 것인가. 좋은 인상을 남기려면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 이대로 가면 18대 국회는 역사상 가장 비겁한 국회로 기록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