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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와 한명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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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박신홍
정치부문 차장

서울 봉천동 달동네에서 두부장수의 딸로 태어난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는 1989년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여성학 특강을 듣게 됐다. 강사는 당시 성심여대 여성학 강사로 있던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였다. 이 대표는 “한 대표는 기억 못하겠지만 제겐 잊혀지지 않는 날”이라고 했다.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13년반이나 투옥된 남편을 뒷바라지해야 했던 한 대표였지만 시종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며 ‘존경스러운 분’이란 인상을 받았다는 거다. 이 대표가 이듬해 서울대 여학생회장을 맡게 된 데는 이날 한 대표에게서 받은 자극도 한몫했다.

 스무 살 여대생과 마흔다섯 살 강사의 스치듯 지나갔던 그날의 인연은 21년이 지난 2010년 서울시장 선거로 이어졌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면서 이 대표가 한명숙 후보 선대위 공동대변인을 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제1, 2 야당의 대표로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물론 당세로 보나, 개인 경력으로 보나 아직 다윗과 골리앗 관계다. 하지만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범야권호(號)를 함께 이끌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한 배를 탄 사이가 됐다.

 난곡 지역에서 선거운동에 한창인 이 대표와 함께 길을 걸으며 물었다. 할 만하냐고. 힘들지만 괜찮단다. 유권자들의 격려가 큰 힘이 된단다. 만나는 주민마다 스스럼없이 손을 맞잡는 모습이 지역구에 처음 도전한 정치인답지 않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 대표를 도와 선거운동을 했던 경험 등이 큰 도움이 된단다.

 총리까지 지낸 한 대표와 차세대 주자로 꼽히는 이 대표는 여성 정치시대의 현재이고 미래다. 하지만 둘 앞에 놓인 현실은 만만찮다. 뚜렷한 자기 사람이 없는 한 대표는 벌써부터 486 그룹에 둘러싸여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대표도 노동운동 출신들이 공고한 다수파를 이루고 있는 당내 구조 속에서 운신의 폭이 넓지 않다. 이번 총선에 명운이 걸려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 대표는 서울 관악을에서의 생환, 원내교섭단체 확보라는 과제를 풀어내야 한다. 한 대표도 어느 때보다 가능성 있다는 제1당과 과반 의석을 이뤄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길은 어디에 있는가. 기존 정치권의 시각에서 골리앗은 다윗이 쓰러뜨려야 할 산이다. 하지만 범야권 지지자들은 ‘박근혜’라는 더 큰 산을 넘어 총선 승리라는 봉우리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다윗과 골리앗이 힘을 합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야권연대 없인 총선 승리도 없다. 여성 정치인은 다르다는 걸 실증해내는 책무도 둘의 몫이다.

 두 여성 대표는 현실정치의 벽을 어떤 리더십으로 뛰어넘을 것인가. 총선을 넘어 대선까지 여풍(女風)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연대를 넘어 통합까지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올 한 해 총선과 대선 정국을 지켜보는 또 하나의 관전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