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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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ins 오현아 기자

소비욕을 부추기는 사회, 가족의 붕괴, 무의미한 일상, 그리고 견딜 수 없는 고독과 소외. 그 속에서 여고생들이 원조교제에 대한 유혹으로 신음하고 있다.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 님의 소설〈여학생의 친구〉(김난주 옮김, 열림원 펴냄)는 정년퇴직한 노인과 삶의 막바지에 몰려 원조교제를 생각하는 여고생의 쓸쓸한 만남을 그리고 있다. 돈으로 성을 주고받는 끈적끈적한 관계는 아니더라도 이들의 만남은 물기 빠진 모래처럼 퍼석거린다.

고베의 엽기적인 살인 사건을 다룬〈골드 러시〉(김난주 옮김, 솔 펴냄) 등 사회 문제에 천착해온 유미리 님은 이번 작품에서도 원조교제 등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여고생들을 매춘으로 치닫게 하는 것은 명백한 사회적 요청이라는 것이다.

주인공 겐이치로는 강제로 정년퇴직 당한 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할 일도 없는' 무기력한 나날을 보낸다. '보다 많이 소비하는 인간이 존경을 받고 비용이 많이 드는 노인은 경멸의 대상일 뿐'이라고 분노하지만 그는 사회가 쓰다 버린 '퇴물'에 불과하다.

겐이치로는 집에서 며느리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편의점의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등 자폐증적인 삶을 산다. '딸 하나 타이르지 못하는 얼간이 같은 아들놈'이나 '야경이 보이는 집에서 살면 장미빛 인생이 되리라고 착각하는 한심한 며느리'와도 철저하게 벽을 쌓고 산다.

우연히 길에서 손녀의 친구 미나를 만나면서 겐이치로의 삶은 갑자기 '할 일'이 생기게 된다. 그녀가 혼자서 생활할 수 있을 때까지 도와주는 것, 그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진정한 원조교제'다.

아버지의 부도로 원조교제를 생각하는 미나, 자살을 해서라도 보험금을 남기겠다는 미나의 아빠, 무슨 수가 있어도 꼭 자살을 하라고 윽박지르는 미나의 엄마, 보험금을 받기 위해서라면 아빠도 죽이겠다는 미나의 동생.

겐이치로만큼 그녀의 삶은 황폐하다. 가족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무의미한 관계, 사회로부터의 철저한 소외, 끊임없이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헛손질만 해대는 공허한 일상. 자살을 시도한 겐이치로처럼 그녀가 유일하게 바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겐이치로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아들을 속이는 '엽기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젊음'에 자신 역시 동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갈망 뒤에 더 큰 허무와 공허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그 역시 알고 있었으리라. 어차피 삶이란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임을, 또 그것을 견뎌야 하는 것이기에.

"아내를 잃고 퇴직을 한 후의 의미 없는 생활, 근거 없는 삶 속에서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지만 지나쳤다. 산다는 것은 무의미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번번이 무언가를 소망한다."(이 책 156쪽)

사회에서 밀려나 공허한 나날을 보내는 육십 노인이나 현실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방황하는 십대 소녀나 모두 버림 받고 상처 입은 자들이다. 사회가 효용성과 소비만을 추구하는 한, 이들을 받아안을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육십 노인이 '여학생의 친구'가 되지만 이들의 관계 역시 일회성으로 끝나고 만다. 어차피 삶이란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희망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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