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우연, 아니면 운명?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59호 30면

얼마 전 청와대에 갈 일이 있었다. 대기실 안에는 몇 사람 없었는데 분명히 나를 데리러온 듯한 여비서가 계속 두리번거렸다. 내 키는 2m 가까이 되는데도 말이다. 마침내 내가 손을 흔들자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그녀는 수원 백씨처럼 들리는 내 성(姓) 때문에 계속 한국 사람을 찾고 있었던 거였다. 내 성이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 이름과 같다는 것도 그녀는 몰랐을 거다. 나는 평생 남북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데 내 성이 한국 성씨와 비슷한 건 대체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우연’과 ‘운명’ 그리고 그 가운데쯤 있는 ‘인연’이란 개념은 외국인으로선 이해하기 어렵다. 그중 인연은 특히 그렇다. 단순히 관계(connections)라고 할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운명도 아니니까. 대체 어떻게 우리를 엮어주는 끈들을 정의할 수 있을까. 결국 나는 학교 동창이나 친구처럼 어떤 관계를 통할 때 우연이니 운명이니 하는 개념을 이해하기가 쉬워진다는 걸 알게 됐다. 거인 같은 내가 한국에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관계를 통해서다.

우연·인연·운명 등의 단어에는 한자의 영향과 거기에 담겨 있는 철학 때문에 단순한 영어 번역으로는 알 수 없는 심오함이 있다. 그래서인지 중국철학을 전공한 내 오랜 친구 정찬수를 비롯한 한국 친구들조차 그 정확한 의미에 대해 설명이 다르다.

최근에 북한산을 등산하다 스님에게 그 단어들의 의미를 물어봤다. 인연과 운명은 불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니까. 그 스님은 세상에 우연은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은 이생이 아니면 전생을 통해서라도 연결돼 있다고 했다. 스님은 나에게 “날아가는 새가 당신 머리에 똥을 떨어뜨린다고 해도 그건 우연히 이뤄진 게 아니다”라는 좀 세속적인 설명을 했다. 그 새와 새 똥의 피해자 사이에는 어떤 깊은 관계라도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내가 한국에 오게 된 건 아무래도 우연 같다. 내가 대학생일 때 어머니는 미국 항공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 덕분에 나는 전 세계 어디든 거의 공짜로 다닐 수 있었다. 1987년 봄 나는 태국에 가려고 했다. 한데 어머니가 한국이 더 안전하다고 했다. 실제로는 내가 한국에 온 뒤 몇 주일 동안 엄청난 시위가 벌어져 수백 명의 대학생이 부상당하고 한 명은 죽기까지 했다. 그로 인해 한국이 뒤집어지는 걸 보면서 나는 평생 연구해볼 만한 나라와 국민을 찾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부터 한국과의 인연은 점점 깊어졌다. 내 아내를 여기서 만났고 친구들도 사귀었다. 처가 식구들과는 친부모·형제만큼 가깝다. 처가에서 나는 ‘셋째 사위’ 아니면 ‘줄리아 아범’인데 장모님 댁에 가면 나는 언제든 백년지객(百年之客)이다.

버클리대 막바지에 나는 학교에서 가까운 ‘아시아재단’에서 일했다. 한·미 포럼 행사를 돕는 게 일이었다. 그 포럼에서 미국은 내 스승인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가, 한국은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한 전 장관과 아시아재단의 인연은 각별하다. 56년 고등학생일 때 미국의 여름캠프에 참가했던 한 전 장관은 아시아재단의 장학금을 받은 3000명의 한국인 중 한 명이다. 지금은 아시아재단 이사이기도 하다. 그 포럼에서 아시아재단 한국 책임자를 만났을 때 나는 “언젠가 나도 저 자리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내 꿈은 23년 만에 실현됐다.

오랫동안 나는 한국 전문가가 되는 게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운명이란 단어에 깔려 있는 결정론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행운 또는 불운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지만 나는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다. 최근에 TV 인터뷰를 하면서 나는 “한국은 내 운명”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런가? 아내와 친구들은 시간이 말해줄 것이라고 한다. 청와대에 갔던 다음 날 나는 북악산을 오르다 전날 본 청와대 공직자와 마주쳤다. 이건 진짜 우연이다. 그렇지 않은가.



피터 벡 미버클리대 졸업. 워싱턴 한미경제연구소 조사·학술담당 실장, 국제위기감시기구(ICG) 동북아사무소 소장을 역임했다. 최근 아시아 재단 한국대표로 부임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