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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유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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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호 31면

바야흐로 ‘정책의 홍수’ 시대다. 자고 나면 새로운 정책들이 정치권에서 봇물 터지듯이 나와 신문과 방송을 장식한다. ‘정책’이란 제품을 만드는 것이 주업(主業)인 나 같은 중앙부처 공무원도 정신 차리기 어려울 정도니 일반 국민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 싶다.

그래서 ‘나가수’ 프로그램처럼 정책의 경연장을 만드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여러 분야의 정책들을 국민이 보는 앞에서 각기 시급성과 중요성에 따라 경쟁적으로 제시하고 낮은 점수 순으로 탈락시키는 방식이다. 어떤 정책이든 ‘기회비용’이 있기 마련이다. 예산이든, 인력이든 일정한 자원(資源)을 수반하는 특정 정책을 결정한다는 것은 그 자원으로 다른 정책을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책을 결정할 땐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정책을 통해 달성하려는 목표는 무엇인지, 이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좋은 정책수단은 무엇인지, 동일한 자원으로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정책들보다 우월한 것인지 등을 꼼꼼히 따져 봐야 한다.

정책의 홍수와 함께 ‘정책의 표류’ 시대도 함께 전개되고 있다. 국회 상임위에서는 저축은행특별법을 통과시켰다. 금융시스템의 골간을 흔들 수 있는 법안이다. 반면에 꼭 처리했으면 하는 일부 법안은 잠자고 있다. 일자리와 경제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서비스산업발전법, 국방체계를 개편하는 국방개혁 법안 등은 처리되지 않고 있다. 통일재원 항아리를 만드는 남북협력기금 법안도 사장될 위기에 있다. 심지어 선거 결과에 따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폐기하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정책의 표류 또한 기회비용을 늘린다. 서비스산업 선진화가 지체돼 의료·교육·관광, 사업서비스 분야에서 만들어지지 못하는 일자리로 인해 얼마나 많은 기회비용을 치르고 있는지 모른다.

유럽 재정위기, 이란 석유 문제, 추락하는 세계경제 등 외환(外患) 위기에 처해 있는 우리에게 정책의 ‘홍수’와 ‘표류’는 많은 우려를 자아낸다. 기회비용도 문제지만 지역·세대·계층 갈등과 국론분열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엄청날 것이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 지켜서는 안 될 선심성 정책을 경쟁적으로 쏟아내 국민의 기대만 부풀리고 미래세대에 부담을 지우고 있지는 않은지. 쏟아져 나오는 정책들은 과연 미래에 대한 비전과 국가경영철학에 기초하고 있는 것인지, 표를 위해 무조건 편을 가르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은 아닌지, 선거가 끝나면 도대체 어떻게 할 것인지 걱정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역사가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바깥으로부터의 위협보다 더 큰 문제는 오히려 안에 있다는 것이다. ‘바보야, 문제는 내우(內憂)야’인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유는 나당(羅唐) 연합군의 군사력 탓도 있지만 연개소문 사후에 발생한 세 아들의 권력내분이 결정적이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프랑스 대표팀이 예선에서 충격적으로 탈락한 것도 선수단 내부의 갈등과 불화 탓이었다. 난공불락 같았던 성(城)들이 외침보다는 내분으로 함락된 수많은 사례들이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IMF 위기, 2008년 금융위기 등 외환이 있을 때마다 힘을 합치는 슬기를 발휘해 위기를 극복해 왔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지금이 더 어려운 시기일 수도 있다. 앞의 두 차례 위기는 운 좋게 정부 출범 초기에 맞았다. 국정운영에서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국력을 결집하기 좋은 때였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는 임기 마지막 해에 맞고 있다. 더욱이 20년 만에 동시에 치르는 양대 선거도 앞두고 있다. 그래서 정책의 ‘홍수’와 ‘표류’로 인한 내우(內憂)의 어리석음이 걱정된다. 우리 사회가 위기 극복을 위한 목표는 공유하면서 건전한 정책경쟁과 생산적 토론을 벌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토론의 중심에는 표를 의식한다면 오히려 하기 힘든 인기 없는 정책들이 자리했으면 더욱 좋겠다.

연개소문이 죽으며 세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 생각난다. “너희 형제는 화합하여 작위(爵位)를 다투는 일을 하지 말라.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오늘날 ‘작위’ 대신 ‘표’와 ‘배지’를 다투면서 선심형 공약을 남발하는 일부 정치인에게는 천 년도 훨씬 넘는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도 유효한 경구(警句)가 아닐 수 없다.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의 운명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김동연 대통령 경제금융비서관으로 금융위기 극복에 기여했고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으로 재정건전화를 주도했다. 미시간대 정책학 박사. 상고 졸업 후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행정·입법고시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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