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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억 자루 팔린 '국민펜' 모나미153 의미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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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이 누군지, 본사가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나미’란 이름은 다 안다. 사인펜·플러스펜·매직 등은 상표 이름인데 어느새 보통명사처럼 쓰인다. 그게 바로 모나미란 기업이다. ‘모나미 153’ 볼펜은 집이든 사무실이든 그 어느 구석에라도 반드시 하나씩은 숨어있다. 디자인은 50년째 그대로다. 송하경(53) 대표는 창립자인 송삼석 회장의 아들로 20년째 기업을 이끌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의 모나미 본사를 찾은 지난 15일은 마침 창사 52주년 기념일이었다. 송 대표는 직원들에게 나눠 줄 축하주를 잔뜩 준비했다며 즐거워했고, 12마리 맹견도 기분이 좋은지 크게 짖어댔다. 누구나 다 아는 문구명가 모나미에서 아직은 ‘아는 사람만 아는’ 애견가 송하경 대표를 만났다. 아 참, 명견들도 함께.

글=이소아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문구업체로는 제일 오래된 건가.

 “아니다. 문화연필·동아연필·한국파이롯트(PILOT) 만년필이 더 오래됐다. 모나미의 전신은 1960년에 세워진 광신화학공업사다. 여기서 처음 생산한 그림물감 상표가 ‘모나미’였고, 크레파스 상표가 ‘왕자파스’였다. 그러다 74년에 모나미가 회사 이름이 됐다.”

●모나미란 브랜드 이름은 누가 지었나.

 “사내공모로 나온 이름이다. 예전엔 생산직에 고졸 여직원이 많았는데, 그중에 프랑스 문학에 빠져 있던 한 여직원이 모나미(Mon ami)를 제안했다. 프랑스어로 ‘친구’란 뜻이라서 어린이들이 곁에 두고 사용하는 문구 이미지에 딱 맞은 거다. 발음도 쉽다. 일본인들도 정확히 발음이 된다. 아무튼 외국 사람들이 꽤 좋아한다.”

●153볼펜은 꽤 오래되지 않았나.

 “맞다. 대한민국 최초의 유성볼펜이다. 62년 경복궁에서 5·16기념 국제박람회가 열렸다. 아버지 송삼석 회장도 선진 기업들을 벤치마킹하려고 박람회에 참석했다가 일본 최대 문구업체 ‘우치다요코’ 사람을 만났다. 그때 거기 과장이 쓰던 볼펜을 보고 깜짝 놀라서 당장 우리도 볼펜이란 걸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거다.”

 송 회장은 수소문을 거듭한 끝에 일본의 ‘오토볼펜’에서 유성잉크 제조 기술을 도입해 왔다. 하지만 툭 하면 잉크가 새서 와이셔츠 값을 변상해줘야 했다. 결국 연구실을 꾸려 수개월 연구를 거듭한 끝에 63년 5월 국산 유성잉크 볼펜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반응은 냉랭했다. 펜촉에 잉크를 묻혀 쓰는 것이 익숙해진 사람들이 굳이 볼펜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직원들은 가방마다 볼펜을 꽉꽉 채워서 하루 종일 관공서, 은행, 기업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볼펜의 장점을 알렸다. 일명 ‘잉크병 없애기 운동’이다. 그렇게 2년쯤 지나자 매출이 늘기 시작했다.

●153볼펜은 계속 만들 건가.

 “안 없앨 거다. 대신 조금씩 다른 라인업을 갖춰서 다양화하려고 한다. 그런데 디자이너들이 고민이 많다. 너무 심플해서 오히려 바꾸기가 어렵다고.”

 모나미는 이 밖에도 ‘국민펜’이라고 불릴 만한 제품들을 쏟아냈다. 사인펜·병매직·플러스펜·유성매직·붓펜·네임펜·컴퓨터펜·보드마카 등. 작은 필기구들이지만 그때까지 한국엔 없었던 ‘발명품’들이었다. “모나미의 경영철학을 꼽으라면 이런 도전과 열정이에요. 흔한 말 같지만, 아직도 그걸로 먹고살고 있는 거죠.” 여기서 잠깐. 송 대표가 열정을 쏟는 또 하나의 대상이 있다. 견공(犬公)들이다. 모나미 본사 옥상에 설치된 견사엔 로트와일러, 셰퍼드, 도베르만, 복서 같은 개들이 10여 마리. 몸무게가 최소 40㎏에서 60㎏이 넘는다. 옥상 문을 열고 들어서자 10여 마리가 일제히 앞다리를 올리고 짖어대는 데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심장이 벌렁거려서 다가서기조차 어렵다.

●개들이 죄다 크다.

 “세계적인 경호견·경찰견들이다. 머리 좋고, 용맹하고 행동력이 뛰어난 데다 훈련을 잘 받았다. 사나울 것 같지만 애교가 얼마나 많은지. 벌러덩 눕는 걸 봐야 한다.”

●훈련을 직접 시키나.

 “직접 훈련도 시키고 교배도 한다. 출장 갈 때마다 비디오, 책을 사서 독학했다. 세계적인 훈련사와 교류도 하고. 결국 99년에 ‘모나미랜드’라고 전문 훈련소를 만들었다.”

●사업을 하는건가.

 “아니다. 개인적인 취미로 보는 게 맞다. 취미가지고 일하면 망한다는 소리도 있던데….(웃음) 처음엔 브리딩(교배)으로 시작했는데 그걸 잘 해보려고 도그쇼에 가서 정보도 얻고 좋은 품종도 들여오고 하다 보니 전문가가 된 거다.”

●동물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20년 전 서울 아현동 집에서 부모님이 요크셔테리어와 고양이를 함께 길렀다. 그런데 눈이 많이 온 날 아침에 마당에 나가 보니까 고양이가 눈을 맞고 누워 있었다. 원래 고양이는 몸이 더러워지는 걸 싫어하는데 이상하다 싶어서 보니 그 아래 요크셔가 있었다. 몸에 마비가 와서 쓰러져 있는 걸 고양이가 밤새 얼어 죽지 않게 덮어준 거다. 그 후론 둘이 정말 친해지더라. 동물들 의리가 사람보다 낫구나 싶었다.”

 개 훈련은 주로 독일어로 시킨다. ‘리비어(짖어)!’ ‘플라츠(앉아)!’ ‘히어(이리와)!’ ‘노(안돼)!’. 송 대표가 크고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하면 개들은 신기할 정도로 즉시 따른다. 송 대표는 신이 났다. 아예 양복 윗도리를 벗고 팔에 두터운 보호대를 끼웠다. ‘포커스!’하고 이름을 부르자 로트와일러가 팔을 덥석 물고 흔든다. 히틀러의 경호견으로 유명한 종이다. 몸집이 워낙 육중해 큰 키의 송 대표조차 버티려면 진땀이 난다.

●물린 적은 없나.

 “왼쪽 어깨를 한 번 물렸는데 (개의) 실수였다. 무는 강도를 보면 안다. 물었다가 ‘아차’하고 금방 놔 주더라.”

●이러다 모나미가 개 사업으로 다각화되는 거 아닌가.

 “하하. 아니다. 하지만 늘 새로운 영역에 대한 도전을 생각한다. 현재 전체 매출의 절반 정도는 유통이 차지한다. 모나미스테이션(디지털 사무 편의점), 출력·디자인 서비스센터(디자인 팩토리)가 있고 전문 유통 서비스를 제공하는 관계사도 여럿이다.”

●어떤 기업을 지향하나.

 “가장 가까이서 문제를 해결해 주는 회사. 필기구든 사무용품이든 결국 문제해결이 주된 역할이니까. 컨설팅을 받고 조사를 해 보니 국민들은 모나미를 ‘친근하고 믿을 만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 정서가 우리에게는 소중한 자산이다.”

●벤치마킹하는 해외 기업이 있는지.

 “독일의 에딩이 있다. 한국이나 일본은 디자인에만 치중하는데, 오히려 디자인은 같고 번호나 이름만 다르게 해서 용도에 따라 쓸 수 있게 하는 거다. 목재 위에 쓸 수 있는 ‘에딩 카펜터스 펜’처럼. 솔직히 모나미 사인펜은 사인하는 데 안 좋다.(웃음) 프랑스의 몽블랑은 개인의 개성을 나타내는 명품펜을 만드는 데 참고하려 한다. 스페셜 에디션을 만들거나 디자이너와 협업(콜래보레이션)을 해서 고급군을 만드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에딩 같은 상품이 실제 있나.

 “산업용 펜이 많다. 조선소에서 쇠를 용접할 때 쓸 수 있는 ‘페인트마카’, 자동차를 칠하기 전에 필요한 부분에 마킹할 수 있는 ‘스킬마카’ 등 산업용 펜이 그 예다. 성형외과에서 피부 위에 표시할 수 있는 ‘스킨마카’도 곧 나온다.”

 가장 최근에 벌인 사업은 문구편의점 ‘알로달로’다. 알록달록한 다채로운 세상을 표현한 이름으로, 문구·디지털용품·캐릭터제품·식음료·문화서비스 등을 통합한 10~20대 전용 종합공간이다. 현재 서울 구의동 등 6개점을 열었는데 올해 안에 전국적으로 50곳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사업 다변화와 함께 매출액은 2052억원(2008년), 2176억원(2009년), 2197억원(2010년)으로 늘다가 외형보다는 수익률 개선에 무게를 둬 2011년 2022억원으로 소폭 줄었다. 하지만 중국·태국 등 해외영업 매출은 꾸준히 늘고 있다. 터키의 경우 필기구 전체 시장의 70~80%를 모나미가 차지하고 있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크레파스는 왕자파스로 사오라’고 할 정도라고 한다.

●필기구도 디지털 시대다. 위기 아닌가.

 “맞다. 문구산업 자체가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데 그 자체가 위험요소다. 나는 오늘날 필기구가 지닌 가치를 ‘터치 오브 휴머니티(Touch of Humanity)’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고 해도 인간이 지닌 의지와 감성은 필기구를 통해 묻어난다. 핵을 폐기하자는 국가간 협정도, 기업 간 인수합병(M&A) 합의서도, 결혼 서약서도 모두 펜으로 서명을 해야 효력이 생긴다. 인간의 터치가 세상을 바꾸는 거다.”

‘모나미 153’ 이름에 담긴 것들

‘1963년 버스요금 15원, 볼펜 값도 15원, 회사의 3번째 제품 ’

‘모나미 153’ 볼펜은 한국 문구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1963년 이래 지금까지 35억 자루 넘게 팔려 한 줄로 늘어놓으면 지구 12바퀴를 돌고도 남는다.

 지난해 뉴욕에서 열린 ‘코리아 디자인 헤리티지전(展)’에선 금성 라디오, 아폴로 전자밥통,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 등과 함께 1960~80년대를 대표하는 디자인 유산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런데 ‘153’이 무슨 뜻일까?

●누가 지은 이름인가.

 “직원이 지은 거다. 당시 전 직원들을 상대로 아이디어를 모았는데 ‘모나미 1963’(생산연도), ‘모나미 501’(5월 1일에 생산됨), ‘모나미 77’(행운의 7) 등이 나왔다. 그러다 한 직원이 ‘모나미 153’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참 어감도 괜찮고 발음하기도 쉽고 해서 정해진 거다.”

●그럼 아무 의미도 없지 않나.

 “아니다. 그렇게 숫자를 붙이고 나서 좋은 의미를 많이 담았다. 예를 들어 당시 신문 한 부가 15원, 서울 시내버스 요금이 15원이었는데 여기에 착안해 153볼펜도 15원으로 했다. 가장 대표적인 소비자 물가 수준에 맞춘 거다. 그리고 회사가 세 번째로 만든 제품이니까 153, 말이 된다.”

●다른 설도 있던데.

 “요한복음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지시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물고기 153마리가 잡혔다’는 내용이 있다. 기업이 반드시 지켜야 할 상도를 일깨우는 상징적인 숫자도 되는 거다. 그리고 1, 5, 3을 더하면 9인데 한국인들이 숫자 9를 좋아하지 않나. 화투의 갑오(두 장의 합이 9)도 있고…. 상황에 맞게, 마음에 드는 뜻으로 생각하면 된다.”

개를 키운다는 것은 …

단순해 보이는 교배도 무수한 노력 필요한 ‘아트’다

취미라기엔 너무나 진지한 송 대표의 ‘견(犬)사랑’. 어른 몸무게만 한 개들을 수백 번 시행착오를 거쳐 훈련시킨 만큼, 이 과정에서 얻는 교훈도 남다르다.

신뢰 하나만 주면 된다

개도 사람처럼 성격이 모두 다르다. 그래서 일대일 커뮤니케이션(소통)이 중요하다. 송 대표는 “훈련법은 모두 다르지만 결국엔 신뢰 하나만 딱 주면 된다”고 일갈한다. 내(주인)가 너(개)한테 뭘 요구하는지 확실히 밝히고, 잘해내면 ‘반드시’ 보상을 준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다. 무조건 목을 잡아당기고, 앉으라고 짓눌러서는 안 된다. 개의 엉덩이가 땅에 닿는 순간, 주인은 ‘오케이’라고 큰소리로 말하고 음식을 준다. 닿기 직전에 오케이를 해도 안 되고, 제대로 앉았는데 음식을 주지 않아도 안 될 일이다. 투명한 의사소통과 확실한 보상. 한번 생긴 신뢰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깨지지 않는다.

노력한 만큼 얻는다

명견은 결코 돈과 시간만 가지고 만들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개들이 있어도 그들 사이에서 원하는 품종을 얻어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브리딩(교배·번식)을 할 때도 조사를 많이 해야 좋은 결과가 나옵니다. 노하우란 것도 조사와 공부를 하면서 생기는 거고요. 사업도 마찬가지예요. 본질을 알아야 하고 조사를 많이 해야 기존 사업도, 신사업도 성공할 수 있어요.”

도전에 지치지 마라

개는 갖은 공을 들여 완벽히 훈련을 시켜도 10년 안팎이면 수명을 다한다. 6~7년이 되면 ‘또 어떤 좋은 품종을 어떻게 만들어 키울지’ 프로젝트에 돌입해야 한다. 송 대표는 이를 ‘도전하는 재미’라고 말한다. 모나미는 유성볼펜·플러스펜·네임펜·매직 등 기존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냈다. 송 대표는 “브리딩이 수많은 변수를 생각해야 하는 아트(예술)인 것처럼 기업도 늘 도전하고 열정을 쏟아야 명성을 이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j 칵테일 >> 언제 잉크인지 분석 좀 … ’

모나미는 다양한 필기구를 용도별·종류별로 생산한 최초의 업체다. 각종 선거에 쓰이는 기표용구부터 공항 출·입국장에서 여권에 찍어주는 잉크까지 모나미 제품이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 그 덕에 다른 기업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상황도 벌어진다. 특정 정부 문서에 쓰인 필기구는 정부기관과 협의해 필요한 만큼만 만들고 재고가 남아도 모두 없애버린다. 범죄에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법원이나 로펌에서 사건조사에 필요하다며 ‘이게 언제 때 잉크인지 분석해달라’ ‘이 잉크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확인해달라’며 찾아오기도 한다. 펜으로 이름을 쓰고 옆에 도장을 찍어야 계약이 이뤄지던 시절엔 (도장밥 원료인) 피마자유에 번지지 않는 펜을 만들어내라는 강압적인 주문도 들어왔다. 대학수능시험 OMR 답안지에 쓰이는 컴퓨터용 사인펜도 모나미에서 생산했다. “수능시험 전날 펜을 잘 쌓아뒀는데 밤새 날씨가 너무 추워서 다 얼어버린 거예요. 새 제품으로 교체하는 데 가슴이 바싹바싹 조여온 적도 있었죠.” 송하경 대표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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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인생은 모래시계다. 계속 돌아가는 게 아니라 딱 정해져 있다고 본다. 내 인생은 없어지고 남이 바라보는 내 인생이 기억되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면 더 가치 있는 일에 신경을 쓰게 된다. 일을 해도 더 조심스럽고 이성적으로 하고…. 내 본성과 다르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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