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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기고] IT와 숙련노동 시장의 변화

중앙일보

입력

IT 벤처기업들이 극심한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IT분야의 숙련 인력을 구하기는 아직도 쉽지 않다.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미국, 유럽, 일본 등 세계 주요 국가에서 IT숙련인력시장은 인력부족 현상에 직면하여 공급자 우위의 시장으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력부족 현상은 단순히 수급불균형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고용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IT숙련인력시장은 기존의 이른바 내부노동시장 시스템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산업사회의 핵심노동력은 주로 대기업에 종사하면서 안정적인 직업과 지속적인 승진 가능성을 보장받고 임금 이외에 각종 부가급여 및 사회보험 혜택을 받는 노동력이었다. 이들은 고용안정을 대가로 회사에 충성하였다.

기존 고용시스템 자체를 바꾼다

그러나, 오늘날의 IT숙련인력은 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하면서 산다. 예를 들어, 실리콘밸리의 젊은 고학력 노동자들은 책상을 옮겨다니듯이 쉽게 직장을 옮겨다닌다. 이들은 노동조합이나 국가 또는 다른 큰 제도를 믿지 않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숙련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사용주에게 요구하는 것은 학습기회를 제공하여 미래의 취업능력(employability)을 높여달라는 것뿐이다. 직업안정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 19세기의 수공업노동자들처럼, 자기 운명의 주인공으로서 자율성이 높고, 노동시장의 위험을 다양한 숙련으로 헤징하는 이들이다.

사용주도 이들의 잦은 이직에 대해 불편해하지 않는다. 한 번 나간 근로자들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회전문’ 인사정책). 자기 종업원이 다른 회사에 가더라도 이들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어 결국 회사의 한 자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는 지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공장이고, 그 안의 기업들은 하나의 부서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IT 분야에서는 경쟁상대가 시간이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제품이 만들어진다. 미국의 경우, 현재 매년 5만 개의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가 등장하고 있다. 이는 1970년대에 수천 개에 불과하였다. 누가 먼저 선점하느냐가 중요하다. 시간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기술적 숙련과 경험이 이미 갖추어진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IT기업들은 그때그때 필요에 가장 적합한 숙련노동력을 외부노동시장에서 사다가 쓸 수밖에 없다.

인력양성보다는 시장에서의 인력조달을 선호

이러한 현상은 결국 IT숙련 인력 조달을 기업 내부보다는 외부시장에 의존하도록 한다. 인력양성(The Make Decision)보다는 시장에서의 인력조달(The Buy Decision)이 선호된다. 기업들도 기술변화가 불확실하고 빨라 미래의 필요숙련을 예측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필요인력을 만드는 것(직업훈련)과 관련된 불확실성과 시간상의 불이익을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장기간의 견습훈련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방식으로 신규채용해야 한다.

또한, 호황기에도 기존의 인력을 해고하고, 새로운 유형의 노동력을 고용한다. 기업들은 PC의 업그레이드 부품을 구입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IT 관련 일자리를 채우게 된다. 이 경우 결국 시장이 노동시장 결과의 중재인이자 조정자가 된다.

노동시장이 공급 과잉일 경우, 사용주가 더 많은 비용을 피용자에게 전가할 수 있고, 공급 부족인 노동시장에서는 피고용자가 사용주로부터 더 많은 지대를 받아낼 수 있다. 자신의 경력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과 시장성 있는 숙련을 가진 자들은 잘 나가고, 노동이동에 제약을 가지고 있거나 경력관리능력이 떨어지는 피고용인들은 과거보다 더 어려워진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시장성있는 숙련을 가지고 있는 IT숙련인력들은 이러한 고용시스템에 저항하지 않는다. 외부채용의 증가와 내부경력개발(또는 승진) 기회의 축소는 내부기업적 관점보다는 외부시장적 관점에서 경력 개발 경로를 찾는 방식으로 대처한다.

이들은 업무 그 자체를 매우 중요시한다. 이들에게는 스톡옵션이 포함된 급여패키지보다는 더욱 매력적이고 시장성있는 업무(mission)나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더 중요하다. 경력 개발이 조직 내에서의 위계 구조에 따라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지속적인 학습의 기회를 보장하는 일련의 과제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들은 고용안정이 보장되던 이전 시기가 반드시 좋았던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전 시기는 피고용자들이 아무런 외부 채용의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기업에 갇혀있었던 산업봉건주의(industrial feudalism)라는 것이다. 사용주들이 피용자에게 고용안정을 보장했던 것은 자신들의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부는 개인의 교육훈련 기회를 보장해야

물론 이러한 노동시장이 전체 노동시장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신경제가 아닌 영역에서도 기술혁신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기술과 숙련이 상당기간은 공급부족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이러한 고용시스템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제1의 정책대안은 교육훈련의 기회 확대일 수밖에 없다. 이 경우 교육훈련은 기업주도라기보다는 개인주도의 교육훈련이 될 것이다. 정부는 개인이 교육훈련을 받고자 할 경우, 세금을 공제해주거나, 교육훈련비를 충분히 제공하는 지원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더 나아가, 상대적으로 소외된 경력관리 능력이 떨어지는 계층에 대해서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평생교육훈련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다음으로, 이러한 시장주도 노동시장에서 정부는 직장 이동과 관련된 노동자들의 부담을 덜어주어야 한다. 기존에 기업에서 받던 각종 부가급여 혜택이나 사회보험 혜택을 기업을 자주 옮겨다니더라도(즉 임시직, 계약직 일지라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편, 미국 MIT의 Laubacher and McGovern은 이러한 시장 주도의 노동시장과 고용관계가 개인의 경력 전망을 더욱 불투명하게 하고, 개인의 고립감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고, 전문직 노동자들의 결사체라고 할 수 있는 ‘현대판 길드’를 통해 이를 극복하자고 제안한다. ‘현대판 길드’는 기업 밖에서 기업을 뛰어넘어 작동하고, 이전에 대규모 사용주들이 각종 부가급여, 경력 기회, 기업정체성, 노동자들의 코뮤니티 등을 제공하던 기능을 넘겨받는다는 아이디어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전문직 모임, 노동조합, 파견업체, 지역 콘소시엄(코뮤니트그룹과 노동자조직 그리고 지방정부 및 교육기관) 등이 이러한 길드의 역할을 자임하기 시작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판 길드’가 전문직의 소속감과 정체성을 확보해주고 경제적 안정까지도 책임지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지는 앞으로의 변화를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전병유 박사는 서울대 경제학 박사를 거쳐 현대경제연구원과 버클리대 초빙 연구원을 지냈다. 주요 연구 분야는 국내외 노동시장 동향과 직업 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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