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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축구] "연예인이야? 축구선수야?"

중앙일보

입력

요즘 선수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경기하러 나가는지 몰라 ―.

한국 축구계의 맏형 이회택이 답답하다고, 후배들을 향해 모처럼 일갈했다. 우직하게 자신을 연마하는 선수가 없다고, 열불나게 인터뷰니 광고니 무슨 행사니 쫓아다니는 선수들만 늘어난다고 그는 야단쳤다. 이회택의 자칭 ‘구닥다리 축구論’.

아아 ―, 그랬지. 하 참. 뭐 어떡허겄어. 기다릴래? 그냥 갈래?”

지난 9월4일 월요일 오후 1시에 전남 광양의 드래곤즈 선수단 숙소에서 이회택 감독을 만나기로 하고, 서울에서 새벽차를 몰아 정시에 도착했다.

광양제철소 제1정문 언저리의 주택단지내 여러 건물 중 백상생활관 제2동 2층이 선수단 숙소이고, 이감독의 방은 그 한가운데다. 방문이 잠겨 있어 휴대폰을 걸었다.

그랬더니 정말 이쪽이야말로 ‘크’하고 ‘돌아버릴’ 응답이 왔다. “크, 이거 돌겠네. 갈수록 깜빡깜빡해서 말야. 내가(약속을) 까먹었어. 어제 일이 있어서 서울에 잠깐 왔다가 지금 가는 길이거든. 지금 청주나 어디 되는 거 같은데 되게 막히네”라는. 그리고는 기자더러 “기다릴래, 그냥 갈래” 하고 되묻는 것이다.

어쩌랴. 이래저래 ‘세월’은 흘러 이감독을 대면한 것이 오후 5시반 무렵. 숙소가 아니라 그곳에서 차를 타고 5분쯤 거리에 있는 드래곤즈 연습구장에서였다. 시커먼, 아니 새까만 얼굴에 희끗희끗 센 머리. 좀 조는 듯, 느긋한 얼굴이다. 고향에 돌아오니 농사짓던 형님이 논두렁에서 털털 손을 털면서 마중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을, 기자는 확 느꼈다. 소탈했다.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누는데 첫마디가 “오늘 늦어서 미안해”가 아니다.

“햐 이거, 하필 오늘은 정말 몰골이 말이 아닌데…. (사진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허름하고 검은 셔츠의 앞자락에 묻은 허연 자국들을 벅벅 손으로 문지르면서) 아까 내려올 때 휴게소에서 배고파서 호떡 두개 사먹었거든. 그거 쨈이 흘러서 말야. 내가 이 모양이야. 이거 지워지지도 않어.”

기자가 분위기를 맞추려고 “(호떡) 남았습니까?”하자 그는 입술을 뾰족하게 모으고는, 대답 대신 이렇게 되쳤다.

“이 먼 데까지 뭣하러 와? 또 우리 아버지 얘기 들으러 왔어? 아휴, 여기저기서 하도 얘기 좀 하라고 난리들을 쳐서 진저리가 나. 그 얘기라면 꺼내지도 말어. 말할 거 뭐 있어. 가슴만 아프지. 내가 아버지 며칠 보고 와서도 지금까지 가슴 쓰려 죽겠는데 저렇게(상봉한 이산가족들) 하룻밤씩 얼굴 보고 가면 오히려 그게 더 한(恨)스러울텐데….”

▷ 걔들이 진짜 스타 맞아?

1990년 10월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남북축구시합이 열렸을 때, 남한팀의 이감독은 평양에서 북의 부친을 만나 3박4일 동안 함께 지냈고, 그것이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지난 8월15일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을 계기로 인터뷰 요청이 몰렸던 모양이다.

기자가 “그게 아니고, 한국 축구 전반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싶어 왔다”고 하자 이것도 풀풀 웃으면서 ‘퉁’이다.

“한국 축구? 그 다 알잖어? 내가 특별나게 더 할 얘기 남았을까? 그게 그거지 뭐. 내려왔으니까 저녁이나 먹자고. 그냥 나 만났다 그러고 몇마디 비벼가지구 적당히 쓰면 스토리 좍 나오잖어. 새삼 또 무슨 얘기를 하누?”

그의 말은 옳다. 한국 축구에 대해서는 이미 그 장점과 단점, 강점과 약점, 개선점과 보완해야 할 점, 경기 때마다 필요한 비책(秘策)과 장기적인 발전책까지 나올 얘기는 사실 모두 나와 있다.

축구광인 기자나 이감독이나 피차 그 뻔한 얘기나 나누자고 만난 것은 아니다. 그런 얘기는 가능한 한 많이 빼는 것이 서로의 시간을 절약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처음부터 대놓고 인터뷰 본론을 꺼냈다.

― 지난번 프로축구 올스타전 감독을 맡았을 때 선수들한테 “겉멋만 부린다”고 야단치셨죠?

“아 그거. 내가 뭐 남의 구단 선수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한 것은 아니고, 그냥 후배들이니까 지나치듯 한마디 한 거지. 야단은 무슨―. 그런데 인터뷰 오래 걸려? 나 10분 이상 얘기할 것도 없고 얘기해 본 적도 없어.”

― (거듭)“겉멋만 부린다”뇨?

“한참 자라는 선수들이 자꾸 다른 데 신경을 쓴다, 이거야. 진짜 축구에 매달려 자기 소질을 살리고 실력을 닦고 해야 하는데 자꾸만 매스컴에서 스타 타령을 하니까 헛바람이 들어가지고….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아 지들(선수들)이 축구 하는 놈들이지 뭐 딴 거 하자는 놈들이야?”

이감독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눌하다’고 하는 것보다 좀더 어눌한 편에 가까웠다. (나중에) 기자가 조목조목 정리를 잘 해 줘서 그렇지, 얘기도 정연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되게 컸다. “생각대로 말할 테니까 나중에 권형이 알아서 적어”라며 그는 직설(直說)해 나갔다. ‘겉멋’이란 말을 길게 말하기 위해 그는 A선수와 B선수를 거명했다.

“정말 솔직하게 권형한테, 아니 축구팬들한테 물어봅시다. 가령 그런 애들이 진짜 스타야? 진짜 축구스타냐구? 지금까지는 다 그거 매스컴에서 만들어 놓은 거 아냐? 아니, 걔들 빠진다구 한국 축구 덧나나? 쓰러져? 스타라는 게 뭐요? 그 분야에서 정말 잘 해서, 노력해서 정상에 올라가고 플레이로 인정받고 해야 진짜 스타지, 매스컴에서 ‘우’ 하면 그냥 스타 되는 거요? 솔직히 대한민국에 그 놈들만큼 축구 못하는 선수 누가 있어?”

― 그들의 실력은 국내외에서 그런대로 인정받는 것 아닙니까?

“바로 그거, 그게 문제야. 그 선수들이 소질이 없거나 축구실력이 없다고 내리까는 게 아니야. 그만한 소질, 정말 우리나라 축구를 짊어지고 나갈 재목감들인데 ‘소질’ 수준에서 땡이야. 더 안 나가. 스무살 안팎이면 앞으로 창창하거든. 소질이 있다, 실력이 있다,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를 들을 때 죽기살기로 자기 단련과 연습에 매달려야 하는 거야. 그러면 진짜 꽃피지.

그런데 그 얄팍한 스타 단계에서 끝나거나 멈춰 버려요. 그냥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그때부터는 자기 단련에 들어가지를 않고 자꾸 딴 데만 신경써. 그게 안타깝다는 얘기지.”

― ‘딴 데’요?

“따지고 보면 그 선수들 잘못도 아냐. 그게 다 매스컴의 횡포지, 횡포. 신문도 그렇고 방송도 그렇고. 조금 한다 싶으면 방송이다 신문이다 해서 가만히 놔두지를 않아요. 경기 마치고 지방에 내려가 있는 놈을 굳이 서울로 불러올려 가지고 인터뷰다 무슨 행사다 특집이다 라고 돌리니까 그 나이(20세 안팎을 의미) 애들이 무슨 생각부터 하겠어?

당연히 머리를 줄줄 기르고 노랑물감에 빨강물감에 떡칠을 하고 이제는 아주 귀고리까지 해대고 말이지. 그런데만 점점 신경쓰더라 이거야. 새벽부터 밤까지 어떻게 하면 자기 축구 실력을 높일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고 틈 나면 미장원 가서 붙어앉아 있다는 말예요. 그게 될 일이냐구.”

선수들의 머리염색에 대해 말을 꺼낸 뒤로, 기자가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감독은 10여분 동안 ‘흥분상태’에 가깝게 얘기를 이어나갔다.

“나두 딸이 있는데 걔가 나보고 정말 구닥다리래. 젊은 애들 머리염색 안하는 애가 없다는 거지. 좋아. 빨갛구 노랗구 간에 좋다 이거야. 그런데 축구스타라면 정말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줘서 축구팬들한테 저절로 스타 소리가 나오게 만들어야 하는 거 아냐? 정신상태가, 앞뒤 순서가 바뀌었어. 몇몇 선수가 스타 소리 들으면서 그렇게 외모에 신경쓰니까 이건 뭐 다른 선수들까지 다 똑같이 한다고 난리야.”

그러면서 고종수(수원 삼성) 선수가 화제 속으로 끌려들어왔다.

“우리가 과일을 설익었다 그러잖아. 설익은 과일 먹어보면 어때요? 겉보기에 빛깔 좋지, 그럴 듯하단 말이야. 그런데 콱 깨물어 보면 어때? 바로 그런 거라구. 속이 익으면 겉에 바르고 꾸미고 닦지 않아도 빛이 난다구. 진짜 스타라는 것도 그런 거예요. 설익은 상태로 자꾸 애들을 스타 취급 해서 축구팬들 앞에 내놓으니까, 축구팬들은 한눈에 탁 알아 보거든. 저 선수가 설익었는지 농익었는지. 스타 아닌 애들을 자꾸 스타라고 우겨서 내놓으니까 축구장에, 그걸 참 욕할 수도 없고, 축구팬보다 여자 중학생 애들이 더 많어. 진짜 익는다는 거, 그렇지 요새 종수가 한꺼풀 진짜로 벗겨졌드만. 이제 진짜 스타답게 플레이해요. 종수도 설익었던 때가 좀 있었는데 지금 보라구. 그런 선수가 머리염색하고 그러면 귀엽잖아. 그래도 요새 염색은 잘 안하드만. 자기 안으로 들어가 노력하니까 플레이가 확 달라. 완전히 달라졌어.”

▷ 빛깔 좋아도 설익은 과일

1970년대 새파랗게 젊은 이회택 선수가 발에 공을 달고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누빌 때의 모습을 올드 축구팬들은 아직 잊지 않았을 것이다. 기자는 그때 초등학생이었다. 선명하게 기억되는 한 장면에서 이선수는 틀림없이 장발이었다. 당시 어른들이 핀잔하고 경찰의 단속 대상이 되기도 했던 그 장발 유행을, 젊은 이회택군도 따랐던 것이다. 자기도 그때 그랬으면서 왜 지금 선수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엄격한 얼굴을 하는가? 그의 변명은 무엇일까?

“몇달인가 나도 장발해 봤어. 그때 좌우지간 젊은이들은 다 하니까 나도 뭐가 뭔지 모르고 처음으로 머리를 길러 본 거야. 그런데 그게 뭐 별것 아니더라구. 축구 하는 데 귀찮기만 하구. 그래서 좀 기르다가 다시 짧은 머리로 돌아갔지. 멋있게 보이려고 하거나 무슨 팬들이 우 따라 다녀서 거기 잘 보이려고 꾸미고 했던 게 아니야. 장발을 하고 다녀도 다듬고 빗고 그런 거 없었어요. 터벅하게 대강 돌아다니는 거지. 지금 선수들의 머리염색(심리)하고는 차원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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