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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전 우리 엄니, 이젠 마누라로 만났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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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연극 ‘3월의 눈’에서 노부부로 호흡을 맞추는 원로배우 백성희(왼쪽)와 박근형.

“40여 년 전 ‘엄니’였어. 엄니가 부르는데 당연히 만사 제치고 달려 가야지.”

 한국 드라마의 ‘맏형’ 박근형(72)씨가 연극 무대에 선다. 1992년 연극 ‘두 여자 두 남자’ 이후 정확히 20년만이다. 3월 1일부터 서울 서부역 인근 백성희·장민호 극장에서 공연되는 ‘3월의 눈’이란 작품을 통해서다. 지난해 원로배우 장민호(88)씨가 했던 ‘장오’역을 연기한다.

 박씨가 ‘엄니’라고 부른 이는 또 한 명의 원로배우 백성희(87)씨다. 둘은 48년 전인 1964년 국립극단의 ‘만선’이란 작품에 함께 출연한 적이 있다. 당시 39세의 백씨가 엄마 역을, 24세의 팔팔한 청년 박씨가 아들 역을 했다.

 “그때는 정말 쳐다보기도 어려웠던 대선배였는데…. 40여 년 만에 ‘모자’가 ‘부부’로 바뀌니 세월은 참 오묘한 거에요.”

 ‘엄마’라는 말에 백씨가 눈을 흘깃했다.

 “장 선생님이 출연할 수 없게 됐다는 얘기를 듣고, ‘누가 좋을까’ 고민고민 했죠. 근데 불현듯 근형씨가 스쳐 가는 거에요. 어딘가 품위 있고 세련된, 새로운 장오가 탄생하지 않을까 싶은 느낌이 온 거죠.”

 ‘3월의 눈’은 지난해 3월 백성희·장민호 극장 개관작이었다. 백성희·장민호, 한국 연극계의 ‘살아있는 역사’가 직접 출연해 화제가 됐다. 막상 내용은 평범했다. 어찌 보면 빈 공간이 많은 수채화 같았다. 하지만 무대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두 노 배우의 연기만으로도 무대는 꽉 채워졌고, 쓸쓸하지만 묵직한 삶의 무게가 온전히 객석으로 전해졌다. “두 원로 배우의 연기는 이제 소리가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시간까지 계산할 경지에 이르렀다”는 극찬이 쏟아졌다.

 박씨는 “장 선생님이 하던 역을 하는 게 어찌 부담이 안 되겠어요. 하지만 배우에겐 그만의 색깔이 있잖아요. 묵묵히,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가야죠”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백씨도 “장 선생이 사뿐사뿐 걸어오는 ‘시인’이라면, 근형씨는 바닥에 있던 감정까지 끌어올려 토해내는 ‘전사’같다”고 거들었다.

 박씨는 현재 경기도 일산에 살고 있다. 연습실까지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지하철에서도 대본을 놓지 않고 있다고 했다.

 “20년 만에 긴 호흡의, 센 놈을 만났는데 정신 바짝 차려야지.”

 그래도 얼굴엔 생기가 있었다.

 “배우에겐 무대에 대한 갈증이 늘 있어요. 그걸 풀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그것도 ‘엄니’랑 하니 더욱 신날 수밖에. 아니 이젠 ‘마누라’라고 해야 하나.”(웃음)

하선영 기자  

 ▶연극 ‘3월의 눈’= 3월 1∼18일. 서계동 백성희·장민호 극장. 2만∼5만원. 02-3279-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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