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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대한독립군, 망국 10년 만에 국내 진공작전 포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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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호 26면

만주 각지에서 통합 독립군이 결성돼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공격을 가하자 일제는 대규모 토벌을 계획했다. 사진은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 쪽에서 바라본 압록강의 모습. [사진가 권태균 제공]

만주의 삼부(三府)
②독립군, 압록·두만강 건너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대종교 1세 교주 나철. 1916년 자결했다.

1919년 8월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은 두만강을 건넜다. 나라를 빼앗긴 지 10년 만에 개시되는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의 시작이었다. 평북 양덕 출신의 포수 홍범도는 이미 의병장으로 큰 명성을 떨친 바 있었다. 일제의 간도지방 무력 불령선인의 동정에 관한 건이란 정보보고는 “연길시 북쪽 의란구(依蘭溝) 지방의 민심은 대체로 전시(戰時) 기분을 띠고 있어 정신이 흥분 상태이며, 일반적으로 홍범도를 심하게 숭배한다. 그는…조선 및 간도 방면의 지리에 밝기는 신(神)과 같다”고 보고하고 있다.

대한독립군은 갑산(甲山)과 혜산진(惠山鎭) 같은 국경도시에 주둔한 일본군 병영을 공격했는데, 10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만포진(滿浦鎭)과 더 안쪽의 강계(江界)까지 공격했다. ‘독립신문’ 대한민국 원년(1919) 11월 8일자는 “자성(紫城) 지방에서 독립군과 적병(敵兵) 간에 격전이 있었는데 적은 7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아군의 사상자는 별로 없으며 강계와 만포진은 아군의 수중에 점령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독립군이 내륙까지 들어와 공격하자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일제에 더 큰 충격은 만주 여러 지역의 무장세력들이 큰 규모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통합 움직임도 3·1운동 때문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단체들 사이에서 통합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었다. 상해 임시정부와 달리 이들의 통합은 독립군의 통합을 뜻한다는 점에서 일제에는 더 큰 위협이었다.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세력들은 몇 갈래로 뭉치기 시작했다. 만주는 압록강 건너편의 서간도(남만주)와 두만강 건너편의 북간도(동간도), 그리고 북만주로 나눌 수 있었는데 각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하고 있었다.

중광단과 대한정의단을 결성한 서일. 군사전문가인 김좌진과 통합해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다.

1910년 망국 직후 서간도에는 서울의 이회영(李會榮) 일가와 안동의 이상룡(李相龍) 일가 같은 양반 사대부들이 망명해 민단 자치조직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1911년 가을 대흉작에 풍토병이 덮치면서 경학사는 활동 불능 상태에 빠졌지만 이듬해에는 다시 부민단(扶民團)을 결성했다. 부민단 단장 이상룡은 만주기사(滿洲紀事)에서 부민단이 ‘삼권분립의 자치정부를 표방하는 단체’라고 전하고 있다. 민주공화제를 지향했다는 뜻이다.

부민단은 1914년에는 산하의 신흥무관학교 외에 통화현(通化縣) 쏘베사 지역에 백서농장(白西農莊)을 세웠다. 일제의 눈을 속이고 중국인들의 경계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농장이란 명칭을 썼지만 사실은 독립군 밀영(密營)이었다. 현재 이 지역에 대해선 중국 군부가 민간인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천혜의 요새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부민단은 서간도의 자신계(自新契)와 통합해 한족회(韓族會)를 결성했다. ‘독립신문’은 한족회 관내의 교포 수가 8만 호에 30만여 명이라고 전하고 있다. 한족회가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자 상해 임정에서 여운형(呂運亨)을 파견해 임정에 합류할 것을 촉구했다. 군정부 내부의 반발도 작지 않았지만 이상룡 등은 “하나의 민족이 어찌 두 개의 정부를 가질 수 있겠는가”라면서 군정부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1919년 11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했다.

서간도에는 국내에서 의병전쟁을 일으켰다가 일제의 남한대토벌에 쫓겨 망명한 의병과 유림세력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대한제국 황실을 재건하자는 복벽파(復<8F9F>派)들이었다. 이들도 서간도 각 지역에 흩어져 있다가 1919년 음력 3월 15일 단군의 어천절(御天節: 하늘로 승천한 날)을 기해 각 단체 대표 560여 명이 유하현 삼원보 대화사에 모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결성하고 도총재(都總裁)에 박장호(朴長浩), 총단장(總團長)에 조맹선(趙孟善)을 선출했다.

독립운동가 출신의 김승학(金承學)이 편찬한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에 따르면 조맹선은 하얼빈에 주둔한 제정 러시아 장군 세미노푸와 교섭해 러시아 군대 안에 2000여 명의 한인들로 구성된 한인청년부를 특설하기로 합의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었는데, 이 때문에 울화병이 생겨 1922년 길림성(吉林省) 추풍(秋風)에서 순사(殉死)했다.

만주 지역 무장투쟁사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세력이 단군교(檀君敎)라고 불렸던 대종교(大倧敎)다. 제1세 교주 나철(羅喆)은 을사늑약 직전 일본 왕궁 앞에서 사흘간 단식항쟁을 하기도 하고 을사늑약 체결 후에는 을사오적(五賊) 중 박제순과 이지용을 제거하기 위해 폭탄 상자를 배달하기도 했던 열혈 독립운동가였다.

대종교 중광 60년사에 따르면 나철은 이 사건 때문에 정부 전복 혐의로 무안군 지도(智島)에 유배되기도 했는데, 1909년 정월 15일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 서울 북부 재동(齋洞) 취운정(翠雲亭) 아래에서 60여 명의 동지들과 단군교를 새롭게 열면서 이날을 중광절(重光節)로 삼았다. 중광이란 기존에 있던 것을 새롭게 중흥한다는 의미였다. 망국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위기를 느낀 사람들이 단군교에 속속 입교했지만 서울 북부지사교(北部支司敎) 정훈모가 친일로 돌아서고 일제의 탄압이 가해지자 나철은 1910년 8월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망국 후인 1911년 7월 나철은 강화도 참성단을 참배하고 평양과 두만강을 건너 백두산 북록(北麓) 청파호(靑坡湖)를 답사한 후 만주 화룡현 삼도구(三道溝)로 총본사를 이전하고 그 산하에 동서남북 사도본사(四道本司)를 두었다. 각 본사(本司)의 관할 범위를 보면 대종교의 광대한 역사의식이 잘 드러난다. 동도(東道)본사의 관할지역은 동만주와 러시아령, 연해주, 함경도였고, 서도(西道)본사는 남만주와 중국, 몽골, 평안도였다. 남도(南道)본사는 전라·경상·충청도와 강원·황해도였고, 북도(北道)본사는 북만주, 흑룡강이었다.

각 본사 책임자를 보면 이 당시 대종교가 독립운동가들에게 어떤 위상을 갖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다. 동도본사는 서일(徐一), 서도본사는 신규식(申圭植)·이동녕(李東寧)이었고, 남도본사는 강우(姜虞), 북도본사는 이상설(李相卨)이었다.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상)에 따르면 임정 수립 당시 의정원 의원 의장 이동녕을 비롯해서 29명의 의원 중 대종교 교도가 21명이었다. 대종교는 독립운동이 곧 신앙생활이었던 교단이었다.

총본사를 만주로 이전한 후 30만 교도로 확장되자 중국과 일제가 모두 탄압에 나섰다. 1914년 중국 화룡현 지사가 해산령을 내린 데다, 1915년에는 조선총독부도 대종교를 ‘종교가 아닌 항일독립운동 단체’라면서 남도본사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나철은 이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1916년 구월산에서 ‘삼십만 교도에게 격려하는 글’과 ‘순명(殉命) 3조’ 등 3종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나철의 뒤를 이어 김교헌(金敎獻)이 제2세 교주가 되는데, 동도본사 책임자 서일이 서른한 살 때인 1911년 3월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한 것이 청산리 대첩의 씨앗이 된다. 중광단은 3·1운동 이후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탈바꿈하는데, 서일은 대종교라는 탄탄한 대중조직이 있었지만 군사 부문에 전문가가 많지 않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 등 한말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이 1919년 3월 결성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에 통합을 제의했다. 그래서 두 단체는 1919년 10월 군정부(軍政府)로 통합했지만 12월 정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라는 임시정부의 권고에 따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했다. 북로군정서는 독판(督辦)에 서일, 군사령관에 김좌진을 추대했고 무관들을 배출하기 위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도 설립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을 교관으로 초빙하기도 했다.

북간도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도 있었다. 대한국민회는 산하에 안무(安武)가 지휘하는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이 있어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통합을 시도했다. 그 결과 1920년 5월 28일 군사통일회의를 열고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했다. 일제의 정보보고는 이 부대의 규모를 최진동 계열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 계열 약 550명 등 총 12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기는 기관총 2문, 군총 900정, 수류탄 100여 개, 망원경 7개, 군총 1정당 탄약 150발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했다.

독립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체코군이 철수하면서 넘기고 간 무기들로 무장했다. 이 무기들은 제정 러시아가 미국의 레밍천사(社), 웨스팅하우스사 등에서 구입한 것을 체코군에 제공한 것이었다. 이렇게 무장한 독립군들은 서로 앞다퉈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경 도시들을 타격했다. 봉오동·청산리 대첩의 전야는 이렇게 만주 독립군의 국내 진공작전으로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