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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동서대립 극복 못 하면 ‘저주의 정치’ 못 막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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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호 06면

문성근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이 2일 부산 선거사무실에서 시민 참여를 통해 분단정치, 지역정치를 극복하자고 강조하고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문성근(59)이란 이름 앞에는 참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문익환 목사의 아들부터 시작해 영화배우, TV프로그램 진행자, ‘노사모’ 주역…. 그는 노무현 정부 출범의 일등공신이었지만 애써 정치와 거리를 뒀다. 하지만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는 그의 운명을 다시 바꿔 놓았다. 이듬해 여름 ‘백만 민란’ 프로젝트를 시작해 사분오열의 야권에 ‘혁신과 통합’을 압박하며 거리에서 시민정치를 시작했다. 그는 4·11 총선을 앞두곤 부산 북-강서(을)에 도전장을 냈다. 분단정치, 지역정치를 극복하자는 기치를 내걸고서다. 문성근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을 2일 부산 선거사무실에서 만났다. 다음은 인터뷰 요지.

4·11총선 돌풍 벼르는 문성근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2010년 8월 ‘유쾌한 100만 민란’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 1년 반 동안 전국을 돌면서 민심을 많이 접했을 듯하다. 이명박 정부의 공과는 뭐라고 생각하나.
“참 어려운 질문이다. 공(功)이라면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 주시고, 남북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경제정책이 서민의 삶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런 것들을 빠른 시간 안에 가르쳐주신 게 가장 큰 공이 아닐까.(웃음)”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라고 본다. 세계화·시장개방 등과 연관돼 있다. 한국 자본주의가 어떻게 나가야 한다고 보나.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민주정부 10년을 되돌아보면 사실 처절하게 반성할 부분이 많다. 그런 토대 위에서 국민과 소통하고 동의를 받아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71년 대선 공약이나 노무현 대통령의 초선 출사표를 보면 당대 정치인 가운데 가장 진보적이었다. 그런데 대통령까지 가는 과정에서 적응해 나갔다고 해야 할까. 우리 국민들은 대기업 중심의 고도성장에 오랫동안 젖어있었다. 참여정부 5년간 연평균 성장률이 4.3%였는데 ‘중국은 10%인데 왜 이렇게밖에 못하느냐’ ‘너희들이 경제를 망쳤다’고 비난받았다. 우리 현실에선 불가능한 것이었는데, 그런 비난을 수용하다 보니 정책·노선에 한계가 생긴 측면이 있다. 또 하나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로 들어가면서 한국 경제에 이식됐던 부분에 대해 전면적인 점검이 필요했다. 적어도 대기업들이 무한정 확장해 나가면서 일자리도 못 만드는 그런 구조가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 국민의 평균 행복지수를 높이는 방안을 찾아야 했다. 한 예로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임금이 급격히 상승했다. 그러면서 중산층과 내수시장이 커졌고, 국가 전체적으로 경제가 안정적으로 발전했다. 지금이라도 더불어 사는 나라, 더불어 성장하는 모델로 방향을 선회해야 한다.”

-직선제 이후 역대 대통령의 임기 말 민심 이반 현상이 왜 심했다고 보나.
“정권마다 조금씩 성격이 달랐는데, 권력이 팔팔할 때는 덮어두다 힘이 빠지면 한꺼번에 분출되기 때문이다. 이건 권력 자체의 측면이다. 여기에다 남북 분단과 동서 지역 구도라는 모순이 있다. 이런 게 복합적으로 작용하면 합리적 토론이 안 된다. 정책 토론보다 상대를 저주하면 당선되는 것이고, 그 바닥에는 모순들이 들끓고 있다. 해결책은 모순 구조의 완화이지, 제도 자체라고 보지 않는다. 4년 중임제로 가면 달라질까. 아마도 (임기 말 현상이) 8년째 가서 또 벌어질 거다.”

-최근 ‘디도스 사건’과 관련해 청와대 개입 사실이 드러날 경우 ‘대통령 임기가 하루 남았어도 탄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대선 역사상 최대 표 차이로 뽑혔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너무 큰 상처가 됐기 때문에 우리 국민은 탄핵이라는 용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따져봐야 할 게 너무 많다. BBK 기획 입국설의 근거였던 편지가 조작됐다는 증언이 나왔지 않은가. 그러면 전면 재수사를 하는 게 마땅하다. 이 대통령 본인도 “그것과 관련됐으면 즉각 현직을 사퇴하겠다”고 얘기한 바 있다. 그 다음 심각한 것은 내곡동 사저 부지 건이다. 그것은 부동산 실명제를 위반했다는 사실이 공개된 것이다. 그리고 국가예산 집행에 대단히 의혹이 많다. 대통령 아들이 땅값의 20%만 내고 지분은 50% 이상을 차지했으니까. 디도스 공격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것을 국가기관인 중앙선관위에 대한 테러이자 10·26 부정선거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미수범이 아닌 성공한 범죄다. 청와대 관계자의 연루설까지 나오는데 특검조차 안 되고 있다.”

-일부 여론조사이지만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대선주자 지지도에서 안철수 교수를 추월했다고 한다. 12월 대선 때 어떤 인물이 야권통합 후보로 적합하다고 보나.
“대권 후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현실에 있는 분들 중 한 분이 될 거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관심이 없다. 4·11 총선에서 민주진보 진영이 다수당이 되는 게 최대 관심사다. 1·15 민주통합당 전당대회 때 시민당원을 비롯해 모두 79만여 명이 참가했다. 12월 대선에서 완전개방형 경선으로 후보를 뽑을 경우 적어도 500만 명 이상 참여할 것으로 본다. 그렇게 된다면 야권통합 후보가 누가 돼도 상관없다. 국민이 원하는 좋은 분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문 이사장의 지지율이 올라가고 있는 걸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기성 정당이 불신을 받는 상황에서 무당파 비중이 40% 이상 됐는데, 무당파가 한나라당 정권의 실정을 보면서 여집합을 찾은 거라고 본다. ‘안철수 현상’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4월 총선에서 ‘안철수 역할’을 요구하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정확한 게 아니다. 나는 그분을 압박한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우리의 목표는 한나라당이 재집권하는 걸 막는 것이다. 그런 논조 안에서 모든 것은 안 교수가 최종적으로 선택할 일이다. 다만 대선 경선 국면에서, 아까 말한 대로 500만 명 이상이 경선투표에 참여해 전국을 돌며 몇 달에 걸쳐서 후보를 뽑았다고 치자. 그런데 (정치권) 바깥에 있던 안철수 교수가 그때야 나선다면 어떻게 단일화를 해야 할까. 결국 여론조사 방식을 택하게 된다. 그러면 500만 명은 뭐가 되는가. 그것은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모바일 투표와 직접민주주의는 예상 밖의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여론조사 전문가들과 얘기해 봤더니 지역구별로 1만 명 넘게 참여하면 조직 동원이 무력화된다고 얘기한다. 이른바 집단지성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4·11 총선에 앞서 각 당의 후보 경선 때 모바일 등록, 모바일 투표를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내가 한나라당 당사 앞에 가서 1인 시위를 한 이유다. 요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혁명이라고 한다. SNS는 24시간 켜 있는 인터넷이다. 우리나라 경우는 정보기술(IT) 환경도 좋고, 스마트폰이 2000만 대나 깔려 있다. 거기다 끝없이 민주화를 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어느 나라보다 직접민주주의라는 인류사적 변화에 가장 빠르게 적응할 준비가 돼 있다. 4월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은 그렇게 할 것이다. 한나라당이 이걸 따라 하면 더 좋겠지만 적어도 방해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부산·경남의 총선 판도를 이야기해보자. PK의 지역구가 41석인데 야당이 10석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부산 민심은 어떤가.
“나는 지역구를 다니면서 주로 말을 듣는 편이다. ‘좀 살게 해 달라’는 분들이 정말 많다. 동남권 신공항, 저축은행 사태 같은 사건 하나하나를 넘어서 총체적으로 낙담이나 고통의 감정이 널리 깔려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당신, 여기에 왜 왔느냐’는 질문이 많다. 그래서 말씀드린다. 부산 북·강서을은 노무현 당시 의원이 2000년 총선 때 당선이 확실한 서울 종로를 버린 뒤 마지막으로 도전했던 지역이라고. 지역구도 극복의 출발점이고, 크게 보면 지방분권과 국토 균형발전의 문제가 얽혀 있다. 노 전 대통령과의 개인적 인연으로도 말한다. 사실 나는 2001년에 노 전 대통령을 돕기로 했지만, 큰형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두 분의 나이가 같다. 노 전 대통령이 문상 오셨을 때 나는 ‘아, 이 분을 큰형님으로 생각해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부산 북·강서을은 노무현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형님의 고향이 내 고향 아닌가. 지역구에서 만나는 분들께 ‘인간적 의리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받아줄 수 없느냐’고 말씀드린다.”

-부산 북·강서을을 선택한 게 혹시 대권 도전 꿈이 있어선가.
“(크게 웃음) 나는 문 목사 삶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 고통을 느끼면서 피해 다녔다. 연기자로서 자유분방하게 살았고, 공직이라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다. 생각이 있었다면 참여정부 때 했을 것이다. 그런 목표를 갖기에는 이미 많이 세월이 갔다.”

-참여정부 때 문화관광부 장관 제의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두 번 검토를 했었다. 처음엔 문광부 장관 제의를 하셨고, 두 번째는 참모들과 함께 통일부 장관 후보로 논의하다가 ‘그 사람이 안 하겠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접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정말 해보고 싶은 일은.
“그야말로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는, 강력한 민주정부를 만들기 위해 야권통합과 온·오프라인 정당 구조를 제안하고 추진해왔다. 그걸 꼭 안착시켜 시민정치를 해보고 싶다. 또 남북 관계 개선에 뭔가 기여를 하고 싶다. 연기자에겐 정년이 없다는데, 미국 CBS TV에서 방영하는 다큐멘터리 ‘60분(60minutes)’의 마지막 코너에 노신사 한 분이 서재에 앉아서 얘기하는 꼭지가 있다. 그런 일을 하고 싶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같은 작품에도 출연하고 싶다.”

정리=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문성근
195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서강대 졸업 뒤 현대양행(현재 두산중공업)에 입사해 자회사 한라건설에서 8년간 근무했다. 영화 ‘경마장 가는 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꽃잎’ ‘오, 수정’ 등 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SBS TV의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을 두 차례에 걸쳐 7년간 진행했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2002년 대선 당선을 도운 ‘노사모’의 주역 중 한 명이다. 2010년부터 유쾌한 백만 민란 프로젝트 ‘백만 송이 국민의 명령’을 주도했다. 1·15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서 한명숙 대표에 이어 2위로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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