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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빙벽'의 꿈 부서진 택시와 함께 형체도 없이 사라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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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호 35면

소설가 이균영의 1995년 모습. [사진 중앙포토]

소설가 이균영(1951~96)을 마지막 만난 것은 1995년 봄, 그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기 1년 반쯤 전이었다. 그는 내 사무실로 찾아와 등단 18년 만의 첫 장편소설이라며 『노자와 장자의 나라』라는 소설책을 건네주었다. 84년 중편소설 ‘어두운 기억의 저편’으로 제8회 이상 문학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중편소설 ‘불붙는 난간’을 발표한 뒤 꼬박 10년 동안 이균영은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그의 재능을 눈여겨봤기에 아쉬워해 오던 터였다. 80년대 막바지엔가 우연히 신촌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을 때도 그는 다른 일 때문에 소설을 쓰지 못하는 데 대한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무렵 이균영은 동덕여대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44> 요절한 소설가 이균영

45년에 걸친 이균영의 짧은 생애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제외한다면 비교적 순탄했던 셈이다. 아니, 한 번쯤의 힘든 고비는 있었던 것 같다. 전남 광양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홀로 서울에 올라와 경복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만 해도 집안 형편은 그의 뒷바라지에 별문제가 없을 만큼 넉넉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그의 집안 가세는 갑자기 기울어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할 정도가 돼 있었다. 몇몇 대학의 입학시험을 치르기는 했지만 번번이 낙방이었다.

그는 항해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우선 병역문제를 해결하려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생각을 바꾼 그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한양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이 무렵 어릴 적부터 품었던 문학에의 꿈을 다시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균영은 중학생일 때 당시 고등학생이던 고향 선배 정채봉(아동문학가, 1946~2001)과 극장을 빌려 2인 시화전을 열 정도로 문학에는 조숙해 있었다.

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소설 ‘바람과 도시’가 당선해 등단하기는 했지만 석사를 거쳐 박사학위까지 취득하는 등 전공에 매달리느라 많은 작품을 발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발표될 때마다 문단과 독자의 주목을 끌었고, 마침내 84년 국내 유수의 문학상인 ‘이상 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수상작 ‘어두운 기억…’에는 얽힌 일화가 있다. 그와 절친했던 선배 작가 김병총의 회고다. 83년의 어느 날 두 사람이 문단의 내로라하는 술꾼 두엇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이균영이 자신의 두툼한 가방을 가리키며 “문예지의 청탁으로 모처럼 중편소설 한 편을 완성했다”고 자랑했다. 술자리는 축하하는 의미에서 한 잔, 격려하는 의미에서 또 한 잔… 그렇게 장소를 옮겨가며 몇 차례 이어지다가 모두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가 돼서야 끝났다.

이튿날 김병총은 이균영의 전화를 받는다. 잔뜩 풀 죽은 목소리다. 지난 밤 원고 뭉치가 든 가방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사본도 없고 아무리 수소문해 봐야 찾을 길이 막막하다는 하소연이었다. 김병총은 “재생할 수 없다면 새로운 소설을 만들어라. 차라리 ‘잃어버린 원고 찾기’를 모티프로 하면 어떻겠나”라고 조언했다. 이균영은 선배의 조언을 받아들여 소설을 새로 썼다. 이것이 ‘어두운 기억…’이다. 이 소설은 술을 마시다 서류 가방을 잃어버린 한 회사원이 가방을 찾아 다니다가 만나게 된 한 술집 여종업원을 통해 파묻혀 있던 옛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분단의 현실과 이산가족의 비극을 심도 있게 묘사했다’고 평했다.

이상 문학상 수상은 이균영의 소설가적 생애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법했지만 이듬해 동덕여대 역사학과 교수로 임용되면서 오히려 휴지기에 접어들게 된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연구가 소설 쓰는 일에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독립운동사 중 신간회(新幹會)에 관한 연구를 마무리 짓는 일은 필생의 과업이었다. 10년 가까운 노력 끝에 93년 ‘신간회 연구’라는 연구서로 마무리되었을 때 학계의 반응은 뜨거웠고, 그는 이 연구서로 ‘단재(丹齋) 학술상’을 수상한다.

이젠 본격적으로 소설에 매달릴 차례였다. ‘노자와 장자…’를 펴낸 뒤 ‘문학사상’에 두 번째 장편소설 ‘떠도는 것들의 영혼’의 연재를 시작했다. 자신의 연구 분야이기도 한 근·현대사를 바탕에 깐 대하소설 ‘빙벽’의 구상을 끝내고 집필에 들어갔다. 96년 안식년을 맞으면서 ‘빙벽’은 속도가 붙어 1000장을 훌쩍 넘어섰다. 하지만 그 무렵 그의 피로는 누적돼가고 있었다. 11월에 들어서면서 이균영은 휴식도 취할 겸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넘었고 늦은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이태원 길을 지날 때 반대편에서 한 택시가 전속력으로 질주해 오고 있었다. 두 택시가 근접했을 때 반대편 택시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이균영이 탄 택시를 정면에서 들이받았다. 두 택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망가졌고, 이균영은 원고 뭉치가 든 가방을 끌어안고 의식을 잃었다. 병원에 옮겨졌을 때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균영의 죽음은 문단과 사학계에 두루 큰 손실이었다.



정규웅씨는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른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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