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증세는 세제개편 3대 원칙에 따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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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여야 정치권이 중구난방으로 증세안(增稅案)을 쏟아내고 있다. 소득세와 법인세의 세율 인상은 물론 재벌세까지 튀어나온다. 복지를 늘리려면 세금을 더 거두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특정 계층에 세 부담을 집중시키는 징벌적 증세안은 숱한 부작용과 저항을 낳는다. 이미 우리 사회에는 세제 개편 3대 원칙이라는 공감대가 마련돼 있다. ‘넓은 세원(稅源)-낮은 세율(稅率)’ ‘형평성’ ‘효율성’이 그것이다. 증세는 이 테두리 안에서 신중히 이뤄져야 한다.

 우선 증세에 앞서 정치권과 정부가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첫째가 지하경제 축소다. 신용카드 도입 이후 과표가 빠르게 양성화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지하경제는 국내총생산(GDP)의 27%를 넘어 그리스보다 심각한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네 번째다. 비대한 지하경제를 방치하고 납세자들에게 세금을 더 내라고 할 수는 없다. 고소득 전문직과 자영업자의 탈세부터 막아야 조세의 형평성과 투명성을 유지할 수 있다.

 둘째로 누더기가 된 비과세·감면 조항부터 과감히 정비해야 한다. 지난해 비과세·감면액은 국세의 14%에 해당하는 30조6000억원이나 된다. 여야가 기를 쓰고 통과시킨 ‘부자세’의 세금은 7700억원인 반면, 농업 분야 비과세만 2조4000억원이나 된다. 얼마 전 장기주택마련저축의 소득공제 폐지를 둘러싼 진통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미 비과세·감면이 기득권이 돼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국회는 지난해 비과세·감면의 일몰기한을 무더기로 3년씩 연장하지 않았던가. 이 두 가지 숙제만 해결해도 실질 조세부담률을 확 끌어올릴 수 있다.

 또한 세율을 올리기에 앞서 세원부터 늘리는 게 올바른 수순이다. 현재 근로소득자의 39%, 자영업자의 41%가 세금을 한 푼도 안 내고 있다. 국민 개세주의(皆稅主義)에 따라 저소득층도 적은 액수의 세금이라도 내야 ‘세금 없이 복지 없다’는 원칙을 세울 수 있다. 법인세율 인상 카드는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는 사안이다. 세계적으로 경쟁력 강화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법인세율은 내리는 게 대세다. 다른 나라와 경쟁하기 위해 법인세율을 내린 뒤 잉크조차 마르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복지를 위한 특별세 도입은 ‘간소한 세제’의 원칙에 어긋난다. 이미 특별세였던 방위세는 폐지되고 교육세도 폐지 논란에 휩싸여 있다. 차라리 일반세를 손질하는 게 정석이다.

 세법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라고 하지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이 있다. 증세는 눈앞의 복지수요뿐 아니라 나라 살림과 경제에 미칠 영향까지 신중히 따져야 한다. 증세론자들은 “OECD 평균보다 한국의 조세부담률이 너무 낮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우리의 조세부담률이 가파르게 증가해 왔고, 여기에다 각종 사회보장부담금까지 늘어난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글로벌 경제가 여전히 불안한 가운데 급속한 증세는 국내 경기를 가라앉힐 위험을 안고 있다.

 정치권과 정부가 증세에 앞서 지하경제 축소와 비과세·감면 정비부터 진지하게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 바탕 위에서 세제 개편의 3대 원칙에 따라 차근차근 증세를 추진해야 한다. 여야는 증세가 정치적 선명성의 도구로 변질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부자에 대한 증오를 자극하고, 99% 국민은 세금을 더 내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은 정치적 선동(煽動)이나 마찬가지다. 앞으로 어느 정권이 들어선들 증세 부담을 넘어서지 않으면 복지사회는 헛구호가 되고 만다. 지금 여야는 복지에 매몰돼 증세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역사적으로 아무리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을 갖추어도 증세는 결코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