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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국회의장의 악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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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백일현
정치부문 기자

국회의장은 입법부의 대표이자 어른이다. 대한민국 의전서열 2위다. 1위인 대통령 바로 뒤, 3위 대법원장 바로 앞이다. 의전 예포도 국회의장은 대통령의 21발에 이어 19발이다. 승용차 번호는 대통령이 ‘1001’, 국회의장은 ‘1002’ 등.

 의전은 밖으로 드러난 것이고, 실질적 권력은 법을 만들고 예산을 심의하는 국회를 이끄는 자리에서 나온다. 마음만 내키면 본회의를 열어 의안을 직권상정할 수 있다. 전임 의장 가운데는 헌법 65조의 대통령 탄핵소추까지 의결한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박희태 의장은 요즘 힘이 없어 보인다. 힘을 쓰지 못하는데도 무척 힘들어 한다. 일이 바빠서가 아니다. 국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되는 ‘국회의장 정치일정’엔 최근 1주일 넘게 딱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통상업무’. 박 의장은 국회 집무실로 종종 출근하긴 한다. 하지만 공지한 것처럼 통상적인 업무는 수행하지 못한다. 디도스 특검법 같은 법안 처리를 여야에 촉구하지 못하고, 국회 관련 행사 참석도 불가능한 ‘식물 의장’일 뿐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검찰 엘리트 출신으로 정치에 입문해 6선을 지냈다. 최고라는 평가를 받으며 대변인 역할을 마친 다음 원내대표, 국회부의장, 한나라당 대표 등 요직을 섭렵했다. 명예로운 퇴진을 앞두고 있던 그는 3년 반 전인 2008년 7월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으로 무너지고 있다.

 박 의장은 18일 해외 순방 후 귀국 기자회견에선 “현재 얘기하라면 모르는 얘기”라고 했다. 그러곤 지금까지 침묵. 전당대회 당시 캠프에 문병욱 라미드그룹(옛 썬앤문그룹) 회장의 돈 수억원이 유입됐다는 말이 나오자 28일 국회 대변인실을 통해 “(변호사 시절) 라미드그룹 계열사로부터 소송 수임료를 받은 적은 있지만, 이는 전당대회 개최 5개월여 전으로 전대와는 무관하다”고 밝힌 게 전부다.

 내심 수모를 견디고 있는 듯하다. 민주통합당 의원 89명은 ‘국회의장 사퇴 촉구 결의안’을 제출했다. 친정인 한나라당도 “경륜에 걸맞은 결단을 조속히 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여비서가 검찰에 소환되고, 대표 경선을 돕던 당협위원장이 구속됐지만 일언반구 말이 없다. 박 의장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고검장까지 지낸 그가 후배 검사에게 불려가 조사받는 일은 개인적으로 악몽일 것이다. 하지만 현직 입법부 수장을 부르기가 곤란하다는 검찰의 어려움을 이용해 3개월 남은 임기를 채우겠다고 버틴다면 이는 국회의 악몽이다. 또한 현역 의장 신분으로 헌정 사상 처음 소환되는 것 역시 나라의 불명예일 것이다. 지금도 국회 홈페이지 의장 인사말은 “국민 여러분의 사랑과 신뢰를 되찾는 데 앞장서겠습니다”라고 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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