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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와 귀 사이’보다는 설익은 감정 앞세우는 사회 … 진지함은 이제 멸종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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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미국 여배우 메릴 스트리프(63)가 올해에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로 지명됐다. 17번째. 역대 최다 지명 기록이다. 나도 스트리프를 좋아한다. 하지만 아카데미상 하면 역시 캐서린 헵번(1907~2003)이다. 스트리프는 한 번밖에 받지 못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헵번은 네 번이나 받았다. 남녀 통틀어 최다 주연상 수상이다. 헵번은 여우주연상 후보로도 12번 지명됐다. 죽던 해에야 스트리프에게 노미네이트 기록 추월을 허용했다.

 지적인 이미지에서 둘은 쌍벽을 이룬다. 스트리프는 예일대를 졸업했고 재작년 하버드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헵번은 심리학 박사다. 자기 주장도 강하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생전의 헵번은 스트리프를 혹평했다. “지나치게 지적인 데다 테크닉에 과도하게 의존한다”며 꼴불견 배우 첫머리에 꼽았다.

 스트리프를 무시할 정도였으니 데뷔 초기 주로 섹시한 이미지로 한몫 보았던 샤론 스톤은 어떻게 비쳤을까. 스톤이 ‘원초적 본능’(1992년)에서 예쁜 다리를 요염하게 꼬는 연기를 선보여 인기와 논란이 쏠리자 헵번이 한마디 던졌다. “그녀의 다리와 다리 사이가 아니라 귀와 귀 사이(between her ears)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 여배우의 최저 수준은 더 내려갈 것이다.” 스톤의 뇌·정신 수준을 조롱하고 깎아내린 것이다.

 다리와 다리 사이는 그야말로 ‘원초적’ 분야이니 논외로 하자. 우리 사회의 귀와 귀 사이 수준도 문제가 많은 것 같다. 지난해 트위터를 시작하면서 아이디를 무엇으로 할지 한동안 헤맸다. 웬만한 영어 단어는 전 세계 트위터리안들이 이미 선점한 상태. 고민하던 중 헵번의 말이 떠올라 ‘betweenears’로 정했다. 다행히 겹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세계로 들어가보니 귀와 귀 사이, 즉 정신력이나 이성보다는 감정·감성이 판치는 곳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어깨와 어깨 사이’(가슴) 세상이라고나 할까.

 그런 탓인지 SNS 바깥에서도 성마르고 촉급한 언사·행동들이 부쩍 늘었다. 어제 보도된 창원지법 이정렬 판사의 법원게시판 글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저는 너무나 화가 나 있습니다”로 시작한다. “이 북받치는 감정을 털어놓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는 말도 한다. 소화 과정을 생략한, 언어의 설사다. 측은한 판사다. 다른 한편에선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가 ‘골프를 하지 않고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걸 대국민 약속이라며 내놓으려 한단다. 웃자니 기가 차고 정색하자니 꼴이 덩달아 우스워진다. 진지함·진중함에 대한 고민이랄까, 뭔가 격(格)을 의식한 듯한 말이나 행동이 그립다. 캐서린 헵번은 최소한 그랬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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