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 뜯겼다" 벌금 선고한 판사 판결문 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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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두 부장판사

2010년 6월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상대 후보를 매수한 혐의로 기소된 곽노현(58) 서울시 교육감. 그에게 벌금 3000만원을 선고한 지난 19일 법원 판결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재판부가 곽 교육감과 박명기(54) 서울교대 교수, 강경선(59) 한국방송통신대 교수에 대해 모두 유죄 판결을 하면서도 형량에서는 큰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곽 교육감이 피해자라는 인식=본지는 2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부장 김형두)가 선고한 판결문을 입수해 분석했다. 그 결과 이번 판결엔 “곽 교육감이 돈을 뜯긴 것이고, 박 교수가 돈을 뜯은 것”이라는 김 부장판사의 기본 인식이 깔려 있었다. 김 부장판사가 곽 교육감을 피해자로 봤음을 엿볼 수 있다. 판결문이 “곽 교육감과 박 교수가 후보 단일화 대가로 돈을 주고받았다”고 결론 내린 것과는 배치된다.

 재판부는 2010년 5월 19일 발표된 후보 단일화 당시 돈 지급 약속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선거대책본부장인 최갑수(서울대 교수)씨, 회계 책임자인 이보훈씨와 박 교수 측 양재원씨 사이에 약속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곽 교육감은 이 사실을 보고받지 않아 초기 단계에 알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논리라면 금품 제공 약속을 통해 후보 단일화가 이뤄지고 실제로 돈이 오갔더라도 후보자 본인만 “몰랐다”고 버티면 정치적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억대의 돈이 오가는 일을 후보에게 알리지 않고 선거캠프 관계자들끼리 결정할 수 있다는 것으로 현실세계의 경험칙과 동떨어진 것이다.

 판결문은 “곽 교육감이 금품 제공 합의를 알고 있었음을 입증할 책임이 검찰에 있는데, 직접 증거가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 그가 뒤늦게 합의 사실을 알고 나서 화를 냈다는 등의 정황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2억원을 준 동기에 대해서도 ‘선의’ 혹은 ‘긴급부조’라는 용어를 써가며 자신을 변호한 곽 교육감의 주장을 대체로 받아들였다.

판결문은 결론 부분에서 곽 교육감이 박 교수에게 준 2억원의 대가성을 인정했다. 판결문은 “후보를 사퇴한 박 교수와 곽 교육감의 관계, 금품의 액수, 돈 지급 경위 등 객관적 요소를 종합하면 법률적 의미에서 대가성이 인정된다”고 했다. 박 교수의 사퇴로 곽 교육감은 단일후보가 되는 이익을 얻었다고 본 것이다. 2억원의 동기 부분에서는 곽 교육감 주장을, 대가성 부분에서는 검찰의 입장을 받아들인 셈이다. 이를 두고 재판부가 법정에서 제시된 증거를 중심으로 판단한다는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양측 입장을 중간 선에서 절충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양형(형량 결정)에서 박 교수에게는 징역 3년의 실형을, 곽 교육감에게는 벌금 3000만원을 선고한 것 역시 절충이라는 시각도 있다. 박 교수는 인신 구속, 곽 교육감은 당선무효형으로 각각 처벌했다는 것이다.

김 부장판사는 “유죄선고를 받은 곽 교육감이 업무에 복귀하면 교육행정에 대한 불신이 생기지 않겠느냐”는 문제 제기에 “그건 제도의 문제이지 판사가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일단 당선무효형을 선고했고, 이른 시일 내에 판결이 확정될 것으로 본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유권자 매수는 실형, 후보 매수는 벌금형=유권자 매수 행위에도 통상 실형이 선고되는 상황에서 지지율을 통째로 사버린 후보자 매수행위에 대해 벌금형을 선고한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다. 2007년 4월 거창군 기초의회의원 선거 때 이모 후보는 상대 후보에게 사퇴 대가로 5000만원을 주겠다는 의사 표시를 한 것만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깨끗한 선거 정착을 위해 엄벌이 필요하다”는 원칙이 곽 교육감 판결에선 평가절하됐다. 판결문은 “(선거 참모들인) 최씨 등의 금전 지급 약속이 곽 교육감이 단일후보가 되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해도 곽 교육감의 책임이 아니므로 양형 요소로 고려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선거문화를 타락시켰으므로 엄벌해야 한다”며 공정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곽 교육감 책임의 정도를 낮게 본 것이다.

조강수·채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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