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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예능 만능’ 대한민국 정치 현주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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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양원보
정치부문 기자

이젠 예능 프로그램이 한국정치에서 무시 못할 플랫폼이 돼버렸다. 예능 프로에 출연한 이후 대중적 지지도와 인지도가 급상승하는 정치인들의 사례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철수 바람’의 진앙도 2009년 6월 방송된 MBC의 ‘무릎팍 도사’였다. 당시 시청자들은 안 원장에게서 ‘공익, 애국, 겸손, 도전’이란 키워드를 떠올렸다고 한다. 방송의 잔상이 2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얼음공주’라는 부담스러운 별명을 지녔던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도 얼마 전 SBS의 ‘힐링캠프’에 출연해 톡톡히 덕을 봤다. 차갑다·쌀쌀하다는 이미지를 털어내는 데 상당한 효과를 봤다는 게 당 내외의 평가다.

 그뿐 아니다. 야권 대선 주자 중 한 명인 민주통합당 문재인 상임고문의 지지율 상승세에서도 같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도 지난 9일 SBS ‘힐링캠프’에 출연, 온몸에 근육이 붙은 특전사 시절 사진을 처음 공개했고 맨손으로 기왓장을 격파했다. 시청률은 10.5%였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의 ‘컨벤션 효과’에다 ‘힐링캠프 효과’를 중요한 원인으로 본다. 문 고문 본인도 동의한다. 그는 “힐링캠프 덕분에 사람 만날 때마다 대화 소재가 돼 분위기가 좋다”고 했다.

 우리만 그런 건 아니다. 1992년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빌 클린턴은 TV 토크쇼 ‘아르세니오 홀 쇼’에 출연해 색소폰 실력을 뽐내며 여심을 사로잡았다. 정치인들의 예능 프로 출연은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성격이 있다. 대중에게 인간적 측면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미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슐츠는 “대중의 인식 속엔 이미지라는 엄청난 힘이 있다”고 말했다. 그게 현실이다.

 하지만 경계할 게 있다. 예능 프로는 속성상 철저히 재미를 추구한다. ‘민낯’이 아닌, ‘화장한 얼굴’을 보여준다. 정치와 다름없는 셈이다. 성희롱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던 무소속 강용석 의원이 한 예능 프로에 ‘고소·고발 집착남’으로 출연한 뒤 일부 네티즌에게 “재밌고 친근하다”는 평을 들은 것도 그런 ‘예능정치’의 소산이다.

 가벼운 이미지가 정치의 대중화에 기여하는 면은 분명 있다. 그런데 이게 정치의 발전과 성숙에 얼마나 도움을 줄까. 많이 웃기고, 많이 즐겁게 해주는 정치인이 반드시 훌륭한 리더일까. 시대적 담론에 대한 고민, 비전에 따른 행동, 그리고 결과에 대한 책임, 이게 예능보다 중요한 한국정치의 동력이 돼야 하는 것 아닌가.

양원보 정치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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