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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시집〈늦게 온 소포〉펴낸 고두현 시인

중앙일보

입력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고두현(37)씨가 첫 〈늦게 온 소포〉(민음사)를 펴냈다.

남해 금산이 김씨의 고향.

어려서 한 때 금산의 산사에서 자라서인가. 김씨의 많은 시들에는 푸른 해원(海原)을 향한 그리운 공간과 산사의 적막한 시간이 길어올려진다.

거기에다 〈유배시첩〉이나 〈발해시첩〉연작 등 고대를 향한 열정은 요즘 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전적 깊이와 운율의 단호한 단아함을 돋보이게 한다.

옆의 시 〈발해 금(琴)〉일부에서 보듯 1천년 그너머 아득한 시절의 시혼이 거문고 가락 타고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 같은 것이 '늦게 온 소포' 다.

"못다한 이승의 아름다움/쑥대궁 뿌리마다 단단히 박아두고/어즈버 내가 없는 날/봄 푸른 들판 되어/꽃 피고 새움이 돋듯 그렇게/다시 살았거라 두고온 것들도 수런대며/돌아와 뒤뜰 동백잎 함께 아물어갈 때/일어나 터지거라 터지고도 모자라면/또다시 누워 채마밭이 되고 새암이 되고/먼 데서 오는 한 벗 구름뿐인 고요가 되고/슬픔이 되어 내 묻힌 노지나 묘등에/땅만 보고 섰을 풀줄기 되라. "

〈유배시첩〉연작 7편 중 두번째인〈울타리 밖에 채마밭을 짓고〉 한부분이다.

시인의 고향 남해는 한 때 권세를 누리던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이 말년에 유배와 살던 곳.

그런 김만중의 일장춘몽 덧없는 마음을 빌어 쓴 이 시에서는 그러나 그러한 삶조차 이승.저승도 뛰어넘고 꽃.채마밭.새암.구름.고요.슬픔.풀로 계절이 돌듯 자연의 섭리에 따른 순환으로 승화된다.

비록 그런 자연적 섭리에서 너무 멀리 유배된 현대인의 풍진 삶이지만 절체절명의 땅끝에서 귀 맑게 씻고 말문 닫은 김씨의 시혼만큼은 젊은 시인으로서는 믿기기 힘든 이런 절창으로까지 다가간다.

"청동 바람이/종을 때리고 지나간다. /화들짝 놀란 새가/가슴을 친다. //좌로 한 뼘쯤/기우는 하늘//별똥별이/내 몸속으로/빗금을 치며 지나간다. " (〈빗살무늬 추억〉전문)고.

그러나 현대의 바쁜 일상은 그곳에서 '유배' 되려 노력하는 시인마저도 빗겨가지 않고 '시 써라' 고 재촉한 탓일까. 아니면 "나는 보았네. 검은 것이/어떻게 가장 빛나는지" (〈세 발 까마귀〉)에서와 같이 우주의 요체, 삶의 비의를 감히 보았다고 섣불리 발설해버려서인가.

끝까지 추적해 '어떻게' 를 풀어 그 꼴을 보여주어야함에도 그렇지 못하고 '어떻게' 만 묻거나 시늉으로 그친 시들도 더러 눈에 띄어 안타깝다.

물론 아직은 젊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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