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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 용어 '엽기' 의 사회학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허걱,엽기다!

중년의 아버지가 컴퓨터게임을 하던 중학생 아들에게 묻는다.

"너 숙제는 다 했니?"
"허걱,엽기다!"

도대체 '허걱'이란 무슨 말이고, 왜 '엽기'란 말이 난 데 없이 튀어나오나. 신드롬이라 불러야할 정도로 만연된 '엽기' 바람이 이제는 일상적된 관용어가 된 탓이다.

'허걱'은 엽기의 의성어, 감탄사다. 어떤 충격에 말문이 막힐 때 사용하는 의성어 '헉' '억' 두 가지를 하나로 묶은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막 튀어나온 말이다. '허걱'은 이전까지 아무도 쓰지않았던 의성어인데, 사이버 세상에서 의성어를 합성한 문어체 표현으로 쓰이던 것이 구어체로 변환돼 현실속에 등장한 것이다. 탄생 과정부터 엽기적이다.

'엽기'도 사전적 의미(괴이한 것을 즐겨 찾아다님)와는 달라졌다. '잔혹하고 기괴한 것'이란 의미에서 '뭔가 색다르고 참신한 것'까지 포괄하는 의미, 오히려 후자가 더 자주 쓰이는 말로 바뀌었다.

이 모든 것들은 사이버 공간이라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왔다. 인터넷에서 '엽기'라는 이름으로 검색하면 수백 개의 관련 사이트가 등장한다. 훼손당한 시체 처럼 그 자체로 끔찍한 사전적 의미의 엽기적 사진도 있고, 사람과 동물의 신체부위를 합성해 섬뜩하면서도 코믹한 그림도 있다.영화 포스터를 패러디한 재치가 돋보이는 재밋거리도 적지않다.

심지어는 방귀소리를 모아놓은 사이트가 있는가 하면 미워하는 사람을 가상의 감옥에 집어넣고 고문을 하는 놀이도 있다.요즘 모두 '엽기'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허걱, 엽기다!"라는 아들의 말을 이해하기 못하는 아버지 세대면 대부분 "에이,뭐 이런 쓰레기 같은 걸"이라며 외면해 버릴만한 것들이다.그러나 청소년은 물론 20대와 30대 초반에 이르는 젊은 세대들은 다르다.

'엽기 인재 양성'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엽끼즌'(http://www.yupkizen.com)이란 사이트를 만든 서무억(25)씨는 "사이트를 만들고 보름만에 10만명이 다녀갔다. 특별히 어디 광고한 것도 아니고, 용돈 20만원을 들여 혼자 만든 사이트인데 이렇게 많이 찾아와 나도 놀랐다"고 한다.

기성세대들이 모르는 사이 엽기가 신세대 문화,사이버 문화를 상징하는 코드가 된 셈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튀어나온 엽기가 기존 문화공간에서도 한창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가장 민감한 분야은 광고. 신세대를 겨냥한 광고에서 모델은 멍청한 표정으로 황량한 벌판에 서있거나 바다로 들어가기도 한다. 돌에 물을 주기도 하고,손가락에서 파란 피를 흘리기도 한다.

기성세대들이 "뭐 저런 광고가 있어"·"저게 무슨 광고야"라며 투덜거리는 것들이 모두 엽기류다.

왜 '엽기'인가

신세대는 우선 엽기적인 것들에 익숙하다. 이들에게 엽기를 가르친 가장 큰 스승은 일본만화다. 1990년대 초반 일본만화는 사이버 공간을 타고 유입되기 시작했다. 잔혹물의 대표격인 이토 준지의 〈공포만화 컬렉션〉은 최근 정식출판돼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일본만화는 우리곁에 와 있다.

만화평론가 이명석(30)씨는 "80년대까지 금기시돼온 것들이 인터넷 통신을 타고 무차별적으로 들어와 그동안 잠재돼 있던 엽기에의 관심을 자극했다. 어려서부터 이런 것들을 보며 자라온 세대들이 엽기적인 것들에 익숙해졌고, 점차 더 자극적인 것을 요구하게 된다"고 말한다.

신세대가 엽기에 열광하는 데는 보다 원초적인 심리학적 해석도 필요하다. 엽기가 상징하는 광기와 폭력성은 기존 질서에 의해 억압받아온 본능이라는 지적이다.

문화평론가 민경배(34·사이버문화연구실장)씨는 "누구나 일상의 권태로부터 탈출하고픈 욕구와 억압적 질서를 파괴하고픈 욕망이 있다. 기존의 질서에 길들여진 기성세대보다 젊은 세대들의 욕망은 더 강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데올로기적 억압속에서 자란 386세대들이 현실정치 차원의 공격성을 지녔다면,사이버 공간의 자유로운 환경속에서 자라온 이후 세대들은 우리사회의 도덕적 억압에 대해 '엽기'라는 이름의 저항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엽기'라는 말이 참신하고 기발한 것들로까지 확산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딴지일보'(http://www.ddanzi.com)와 같은 패러디 사이트다.

딴지일보가 표방하는 '본지는 한국농담을 능가하며 B급 오락영화 수준을 지향하는 초절정 하이코메디 씨니컬 패러디 황색 싸이비 싸이버 루머 저널'이란 모토부터가 기발하며 노골적이다. 문화평론가 선동수(34·웹진'Dotz' 편집장)씨는 "딴지일보가 시작한 '상식과 주류문화를 뒤집는 발상' 자체가 일종의 악취미며 엽기다.

기본적으로 이런 전복적인 발상이 재미를 준다는 점에서 엽기적인 것이 참신하고 기발한 것으로 확대해석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엽기는 어디까지나 하위문화의 영역을 벗어나기는 힘들다.폭력적이고 공격적인 문화가 주류를 형성하기는 힘든 탓이다.그래서 민씨는 "엽기는 신세대가 구세대와 스스로를 구분하는 구분짓기"라고 규정한다. 신세대들의 경우 기존의 질서에 대한 반감에서 금기시돼온 하위문화에 몰두하고, 또 그럼으로써 기성세대와 다른 나름의 동질감을 찾는다는 것이다.

엽기류가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폭력과 광기가 엄연한 인간의 본능이고, 성숙한 사회는 이같은 저항 문화를 포용하는 다양성을 하위문화로 거느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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