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애니메이션 위상 높아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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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피해를 '사랑과 평화' 로 승화시킨다는 취지로 1985년부터 시작된 일본 히로시마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은 성격이 매우 독특하다.

우선,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 대부분 영화제와 필름 마켓을 함께 여는데 비해 히로시마 대회는 순수 영화제를 추구한다.

두번째로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가급적 배제하는 대신, 셀.인형.클레이.종이등 전통적인 제작방법을 통한 '휴머니티' 를 모색한다는 점이다.

세번째는 작가주의 성향을 강조하는 독립애니메이션 공모전에 가장 큰 비중을 둔다는 점이다. 이것은 상업 만화영화의 강국인 일본내에서 만화영화를 다양하게 만드는 양대 산맥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지난달 24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제8회 대회 역시 이런 특색을 잘 유지해냈다. 비록 기획상영전의 내용이 다소 약해진게 아니냐는 얘기가 있기도 했지만, 59개국에서 응모한 1천2백31편중 본선에 진출한 58편의 작품 수준은 역대 어느 대회보다 높았던 것으로 평가됐다.

이런 가운데 이명하 감독의 〈존재〉는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초로 국제대회 본상(데뷔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뤄낸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계원조형예술대팀의 〈아빠하고 나하고〉도 본선까지 진출, 좋은 반응을 얻었다.

페스티벌 디렉터인 기노시타 사요코(木下小夜子)여사는 "한국의 본상 수상은 일본 감독들에게도 자극이 될 것" 이라고 논평, 높아진 한국 애니메이션 위상에 대한 경계심을 간접적으로 표출했다.

이 행사의 또 다른 특징은 어린이와 작가들에 대한 배려다.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에 의한' 애니메이션은 이 대회의 주말 고정 프로그램. 아이들이 직접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볼 수 있는 '키즈 클립' 역시 성황리에 운영됐다.
여기서 만든 작품을 폐막식에서 상영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 세심함을 잘 느낄 수 있다.

세계 최고의 거장들에서 이제 처음 작품을 만든 학생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여 격의없이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토론할 수 있는 '프레임 인' 행사를 여는 점도 다른 행사와 다른 점이다.

이밖에 영화 〈화성 침공〉의 화성인 인형을 만들었던 '맥킨논 앤 사운더스' 의 섬세한 모형인형전, 인형 애니메이션의 대가 모치나가 타다히토의 손때묻은 작업실을 옮겨놓은 듯한 전시회 등도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국내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학과가 40여개를 넘어섰고 애니메이션 고등학교까지 설립된 올해는 3백여명 가까운 한국인 참관단이 이곳을 찾았다.

국내에 불기 시작한 애니메이션의 뜨거운 열기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한편 한국 작품이 두 편이나 본선에 올랐는데도 통역이 준비되지 않아 기자회견이 무산될 뻔한 점은 조직위원회측의 무성의를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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