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금융사만 배불리는 노후대비 연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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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나현철
경제부문 기자

단기 상품보다 장기 상품 수익률이 높은 건 금융의 ‘룰’이다. 은행 예금만 봐도 한 달짜리보다는 1년짜리가, 1년짜리보다는 3년짜리가 금리를 더 준다. 만기가 길어질수록 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금융시장에선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대표적 장기 상품인 노후 대비용 소득공제 상품들의 수익률이 형편없다. 금융소비자연맹이 지난해 은행의 개인연금신탁과 퇴직연금 수익률을 조사해보니 평균 2.14%에 불과했다. 1년짜리 정기예금 금리의 절반을 갓 넘는 수준이다. 지난해만의 일이 아니다. 은행 개인연금 상품의 최근 5년간 평균 배당률은 연 3.9%다. 같은 기간 정기예금 평균 금리(연 4.5%)를 한참 밑돈다. 장기투자를 하면 손해 보는 구조다. 더 큰 문제는 성격이 비슷한 다른 상품과의 수익률 격차다. 은행의 채권형 개인연금은 지난해 대부분 2~3%의 저조한 수익을 냈다. 자산운용사의 국내 채권형 펀드가 같은 기간 중 기록한 성과(4.59%)에 훨씬 못 미친다. 같은 방식으로 같은 자산에 투자한 결과 치고는 차이가 너무 크다.

 그런데도 고객들은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소득공제라는 족쇄 때문이다. 이들 상품은 대개 최소 10년간 붓고 55세 이후에 찾는다는 조건으로 연말정산 때 근로소득세 감면 혜택을 준다. 과세표준이 3000만원인 근로자가 연 300만원을 부으면 평균 20만원가량의 세금을 덜 낸다. 대신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그동안 돌려받은 세금을 다 토해내야 한다. 이자는커녕 그동안 낸 원금의 80%를 건지면 다행이다.

 재미를 보는 건 금융사뿐이다. 은행들은 개인연금 원금의 1%가량을 수수료로 해마다 떼간다. 비슷한 상품에서 보험사들의 사업비는 평균 8%에 이른다. 노후 대비를 장려함으로써 장기적인 재정 부담을 줄이려는 소득공제 제도가 고객이 아닌 금융사들의 배를 부르게 하는 셈이다.

 소득공제 상품은 금융사의 볼모가 아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금융사는 물론, 당국에 대한 신뢰도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본격화되는 초고령화 시대가 코앞에 와있다. 금융회사는 노후 대비용 소득공제 상품의 수익률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당국도 장기상품 수수료나 사업비를 낮추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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