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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배병우, ‘소나무’ 30년…한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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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2007년 경남 함양. 그는 여느 때처럼 컴컴한 새벽길을 나섰다. ‘제대로 찍어보리라’ 점찍어 둔 소나무를 향해서였다. 이번이 벌써 수십 번째. 매번 허탕을 치고 되돌아왔다. 아침에 해 뜰 때 안개가 쫙 깔리면서 빛이 떨어지는 그 찰나. 자연은 최고의 순간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또 한번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오늘도 김샜군’ 싶었다. 그런데 돌아서려는 순간,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안개가 어느새 몰려와 있었다. 앞에 있던 비닐하우스와 집들이 순식간에 다 덮였다. 본능적으로 셔터를 쉴 새 없이 눌러댔다. 그리고 3분 뒤 안개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다시는 안 올 순간이었다.

사진작가 배병우(62). 7년 전 가수 엘턴 존이 작품을 사 가고, 2009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왔을 때 선물받은 사진집의 주인공. 현재 일본 국립현대미술관, 독일 아핀자 컬렉션, 이탈리아 시실리 컬렉션 등 세계 곳곳에 작품이 걸려 있는 30년 차의 한국 대표 작가. 그런 그에게도 최고의 순간은 서너 번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나는 매일 일기 쓰듯 사진을 찍는다. 늘 워밍업이 돼 있어야 최고의 순간을 잡을 수 있는 거다.” 사진가의 조언이 아닌 인생의 교훈처럼 들렸다.

지난 연말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 예술인촌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는 마주 앉은 테이블에 커피와 와인을 함께 내왔다. 한낮 술대접도 낯설지만 와인병에 눈길이 갔다. 라벨에 그의 소나무 작품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연인즉슨, 30대부터 마시던 이 독일 와인을 이제는 양조장에 특별히 부탁해 라벨 없이 수입한다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소나무 얘기가 먼저일 수밖에 없었다.

●와인에까지 소나무다.

 “그게 내 이미지 아닌가. 83년부터 소나무를 찍었으니까.”

●왜 소나무였나.

 “내 고향이 여수다. 어릴 때부터 바다를 그렸고 사진을 막 시작할 때부터 참 많이 찍었다. 그런데 바다는 굉장히 우주적이고 세계적인 소재다. 그럼 우리만의 상징은 뭘까, 그러다 소나무를 생각했다. 소나무가 진짜 멋있어서 한 건 아니다.”

●원래 한국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나.

 “처음 소나무를 찍고 다닐 때 유치진씨 아들인 유덕형 서울예대 총장이 ‘바로 이거다’라며 칭찬을 많이 해줬다. 그는 ‘내가 뉴욕에서 연극을 해보니 한국적인 소재를 할 때가 가장 먹히더라’고 했다. 우리에게 근거하지 않은 걸 하면 오래 못 간다는 말이 큰 격려가 됐다. 사실 ‘왜 소나무가 한국적인가’라는 근거는 뒤늦게 찾기 시작했다. 겸재의 그림을 파고들었더니 소나무가 우리네와 정말 친숙하더라. 집에도, 관(棺)에도 소나무가 쓰이고 무덤가에도 소나무가 서 있었다. 내가 우리나라의 상징을 붙들었구나, 싶었다.”

●덕분에 작품들이 ‘사진으로 그리는 수묵화’라는 별칭도 얻었다.

 “이탈리아 아트넷 사장이 해준 말이다. 내 사진을 보더니 동양 수묵화의 전통을 사진으로 다시 구현하는 것 같다고 했다. 18세기 독일 화가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처럼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그렸다면서 ‘신낭만주의’라고 하더라.”

●수묵화라 흑백을 고집하나.

 “나무는 그 자체가 모노톤일 때가 많다. 차라리 톤을 잘 예측해 흑백으로 찍는 게 낫다.”

●시작했을 때부터 인기를 모은 거 같지는 같은데.

 “맞다. 1990년대 초까지도 국내 사진은 실험적 사진이 대세라 내 사진을 비웃었다. 무슨 소냐무냐는 거다. 구본창·김중만이 한창 주목받던 시기였다. 그런 사진들은 다 외국 유행 따라간 것뿐이었고 처음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웃기는 건 지금 그네들이 다 나처럼 풍경사진 하고 있다.”

●이제는 소나무가 지겹지 않나.

 “근데 사람들이 계속 사지 않나. 물건이 재고가 있어야지. 하하.”

 그는 해외에서도 인기 있는 작가다. 2005년 엘턴 존이 런던 로열아카데미 사진시장에서 그의 소나무 사진을 1만5000파운드(약 2700만원) 주고 사간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그의 사진은 수천만원대로 폭등하며 각종 아트페어에서 이름을 날렸다. 얼마 전 세계 최고의 컬렉터 중 하나인 악셀 베르보르트(Axel Vervoordt)도 그를 찾아 한국에 왔다. 그는 “악셀에게 해인사 팔만대장경과 경주, 하회마을과 양동마을, 제주의 오름 등을 소개했는데 한국의 미(美)에 놀라워했다. 개인적으로도 소나무보다 오름을 더 좋아하는 데 특히 오름에 관심을 보여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배병우 사진작가의 작품들
① 최고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찍은 경남 함양의 소나무. ②2005년 가수 엘턴 존이 구입한 소나무 작품. ③봉긋한 여성의 가슴을 닮은 ‘제주 오름’ 시리즈.④주상절리를 담은 ‘제주도’ 시리즈.

●국내외로 작품이 얼마나 자주 팔리나.

 “1년에 10개 팔면 먹고산다.”

●값은 많이 올랐나.

 “주변에서 1억 이상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

●외국에서 더 많이 사가나.

 “6대4 정도로 외국 컬렉터가 좀 더 많다. 외국에는 더 비싸게 판다. 작품이 잘 팔리니까 사는 게 편하다.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 안 해도 되니까.”

●그런데 왜 사람들이 소나무를 좋아할까.

 “나도 유럽 사람들한테 물어봤다. 그네들한테는 숲 속에 요정이 있다는 미신(?) 뭐 그런 게 있더라. 그래서 내 사진을 보면 나무가 걸어다니는 듯한 숲의 정기를 느낀단다. 실제로 이런 스토리가 먹히지 않는 미국 쪽에서는 내 작품을 별로 안 좋아한다. 그런데 더 직접적인 이유가 있다. 지구의 온난화다. 사람들이 처음엔 잘 모르다가 이 지구가 심상치 않구나, 자연에 대한 생각이 변하더라. 우리나라에서도 소나무가 픽픽 쓰러진다.”

 그는 이런 연유로 지난해 CF 제의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2011년이 유엔이 정한 ‘숲의 해’였기 때문이다. ‘사진만 팔면서 먹고사는 게 편해’ 모두 사양했지만 딱 하나, 쌤소나이트와의 협업만 수락했다. 1년 중 3분의 2를 국내외에서 보내다 보니 ‘남들과 다른 가방’에 흥미를 느껴서다. 슈트케이스에 소나무 사진이 찍혀 1200개가 생산됐다.

●시대를 잘 타고난 것 같다.

 “안타까운 이유지만 사실 그렇다. 게다가 지금은 어느 분야나 중국이 뜨고 있지 않나. 예술계도 극동아시아, 그중에서도 수묵화가 덩달아 관심을 받고 있다. 자연 소재에다 아시아의 감성이 합쳐진 작품이니 사람들이 주목하는 거다.”

●영어 이름을 ‘Bae Bien-U’로 표기하는 이유는.

 “언어학 하는 친구가 있다. 20년 전에 세계적인 사람이 되려면 이름이 길면 안 된다고 그러더라. 또 표기법대로 써도 나를 ‘배병우’라고 정확히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그럴 바엔 여러 나라 말을 섞으라고 했다. 그때 여권이랑 뭐랑 다 바꿨다. bien이 스페인어·불어에서 ‘좋다’라는 뜻 아닌가. 독일어에서는 U가 ‘우’로 발음되고. 그래서인지 스페인·프랑스 사람 중에 컬렉터가 많더라.”

 인터뷰는 중간중간 끊어졌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일일이 사진집들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작업실 3층의 ㄴ자 공간은 세로 벽면이 책으로 가득 차 있어 흡사 도서관 같았다. 얼핏 세어도 1000여 권은 족히 넘어 보였다. 대부분 사진 책들이었는데 헬무트 뉴튼, 시노야마 기신 등의 사진집 외에도 동서양 화집들이 눈에 띄었다.

●책이 많다.

 “내가 사진과 전공이 아니다(홍익대 응용미술학과 졸업, 공예도안학과 석사). 독학을 했기 때문에 대학원 다닐 때까지 사진에 관한 한 안 읽은 책이 없다. 일본 서적은 아버지께서 30~40권을 번역해줬다. 홍익대 미대 도서관에 있는 미술책도 다 뒤져 봤다. 그래서 잠깐 논문 대필 아르바이트도 했을 정도였다. 어찌 됐건 지금 생각하면 혼자 사진을 배웠다는 게 참 다행이다.”

●미술을 전공했는데 왜 사진을 택했나.

 “1학년 때 서울대 미대 간 동네 선배가 있었다. 자기가 사진 해보니 어려운데 너는 할 수 있을 거라면서 카메라를 줬다. 그때부터 그냥 찍고 다녔다. 백두대간과 고향 여수의 바닷가, 경주 왕릉과 제주 산간을 오르내렸다. 그냥 내 맘대로 했다. 어디 가서 조수를 안 한 게 참 다행이었다.”

●후회는 없나.

 “호남에선 내가 그림으로 1, 2등 했었는데 대학 가니 선수들만 모여 있더라. 30분 만에 자기 그림 다 그려놓고 동기 데생까지 다 고쳐줬으니까. 그 친구들이 지금 다 학원에서 학생을 가르친다. 내가 월급 4만원 받던 시절에 200만~300만원 벌었다. 그런데 10년 지나니까 완전히 기계처럼 됐다. 그렇게 되면 인생 버리는 거지. 학교 다닐 때 안상수(그래픽 디자이너)나 나나 다 학점이 B 아니면 C였다. 인생이라는 게 모르는 거다.”

●사진 전공이 아닌데 교수(서울예대)까지 했다.

 “졸업하고 남의 그림, 남의 조각, 남의 집 사진 찍어주고 닥치는 대로 벌고 있었는데 서울예대 총장이 학교 포스터를 찍어달라고 하더라. 그러더니 사진과 창설했다고 학과장 맡으라고 했다. 보직 절대 안 받고 전권을 주는 조건이었다. 지난해 퇴임할 때까지 내 맘대로 했다.”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카메라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거다. 자기 근본이 가장 중요하다. 자기가 가진 것을 계발해야 한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나무를 그렸으니 여기까지 온 거다. 풍경사진의 대가였던 안셀 아담스는 작곡가였고, 녹색칠을 한 석고 고양이 떼를 찍어 ‘방사선 고양이’ 시리즈를 내놓은 샌디 스코글런디는 조각가였다. 브라질의 다큐멘터리 사진가 세바스티앙 살가도도 경제학 박사로 제3세계를 연구하다가 그들의 분노와 비애를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 기초가 없이 남의 것이나 흉내 내면 경쟁력이 없다. 나는 구본창·김중만이 갑자기 스타일을 바꾼 게 안타깝다. 계속 인물 찍었으면 우리나라 중요한 사람들을 다 찍었을 텐데. 나이 육십에 갑자기 풍경사진을 한다. 나보고 인물 찍으라면 난 못할 텐데.”

●애초에 가진 것이 별로 없다면 어쩌나.

 “한국 사진학과는 사진 기술자를 만들기는 좋지만, 예술적 소양을 일러주지는 못한다. 사진이 예술이라면 미술을 알아야 한다. 미술을 모르면 예술사진을 할 수 없는데 요즘 애들은 기술만 있지 소양이 전혀 없다. 패션 사진을 찍더라도 예술감각이 있어야 한다. 예술과 상업이 잘 혼합돼 있어야 좋은 패션 사진이다. 보도 사진도 마찬가지다. 예술과 커뮤니케이션이 맞물려 있어야 역사에 남는 거다. 빵모자 쓰고 농부 뒷모습 찍는 게 예술사진이 아니다.”

●자신보다 가능성 있는 후배가 있나.

 “아직도 모르겠다. 지겹지. 맨날 구본창, 김중만, 나라는 게. 언론계 책임도 있다. 어린 애들을 좀 밀어줘야 하는데. 요즘은 외국 나가서 많이 배우는데 그게 예술에서는 불리할 수도 있다. 남의 스타일 배우면 자기 것이 없어질 수 있으니까. 그걸 딛고 가면 더 좋은데 참.”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 찍나.

 “하하. 동기창(董其昌·1555~1636·명대 말기의 화가이자 문인)은 예술가는 타고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만 권의 책을 읽고 만(리) 길을 여행하면 예술가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다음 주제가 궁금해진다.

 “여수 바다에서부터 고등학교 때 거문도도 가보고 대학 입학해서는 제주도까지 가봤다. 나머지 섬은 ‘습작’이구나 싶더라. 30대 때 크레타·시칠리아·아프리카·이집트·프랑스까지 지중해를 엄청 누볐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우리 남해안이 훨씬 더 아름답고, 미래의 바다라는 거였다. 뭐 로렐라이 언덕이 유명하지만 실제 가보면 사진만큼 감동적이진 않다. 남해안을 사진으로 더 아름답게 찍고, 그래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다. 일단 제주를 소재로 3년 뒤쯤 큰 전시회를 열 생각이다. 그 뒤엔 덕적도·굴업도 등 남해안을 누비겠다. 죽을 때까지 다 못 할 일이다.”

What Matters 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

“일이다. 일을 열심히 하면 모든 게 생긴다. 돈도, 여자 팬도 생기지 않나. 뭔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자체가 인생을 살아나게 한다. 나도 며칠 서울에서 술 마시다 보면 ‘내가 이러면 안 되지’ 그런다. 자연을 아무 생각 없이 즐기는 자체가 행복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려면 건강도 좋아진다.”

j 칵테일 >> “선생님 때문에 자꾸 살이 쪄요”

작가의 작업실에는 제대로 된 주방이 갖춰져 있다. ㄴ자 아일랜드식 널찍한 구조로, 큼지막한 오븐·밥통과 각종 조리기구가 눈길을 끌었다. 요리 실력이 뛰어난 그가 직접 끼니를 해결하기 때문이란다. 웬만한 생선 요리는 다 하다 보니 회 뜨는 칼까지 갖춰져 있다. “초밥 정도는 작업실 제자들도 웬만큼 하는 수준”이라는 말이 과장 같지 않아 보였다. 인터뷰 당일에도 여수에 사는 이모들이 직송해준 삼치를 굽고 청국장을 끓였단다. 그 말을 듣던 제자 중 한 명이 행복한 푸념을 더했다. “선생님 때문에 자꾸 살이 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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