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말발 안 먹힌 박근혜 … ‘버핏세’ 밀어붙인 쇄신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임진년 새해를 10분 앞둔 지난해 12월 31일 밤 한나라당이 국회 본회의에서 ‘부자증세안’(소득세 최고구간 신설)을 전격 통과시킨 것은 일종의 ‘반란’에 가깝다. 당권을 쥐고 있는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에 대해서다. 그는 부자증세안 신속 처리에 끝까지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당내 쇄신파 의원들이 야당과 합작해 그를 굴복시킨 모양새가 됐다.

 국회 기획재정위가 12월 28일 현행 소득세 최고세율(과표 8800만원 이상에 대해 35%)을 그대로 유지하는 소득세법 개정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을 때만 하더라도 이게 본회의에서 뒤집힐 것으로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12월 29일 한나라당 비대위 회의에서도 상당수 위원이 “부자정당 이미지를 벗기 위해 부자증세안을 수용하자”고 주장했지만 박 위원장이 “신중하게 더 검토해 총선 공약으로 제시하자”는 자세를 고수해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쇄신파의 핵심인 정두언 의원이 민주당 이용섭 의원과 접촉해 본회의에 소득세법 개정안 수정안을 내기로 의견을 모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 의원은 원래 과표 1억5000만원 이상에 대해 최고세율 40%를 매기자는 수정안을 준비하던 중이었으나 정 의원의 요청으로 과표 2억원 이상에 대해 38%를 매기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정 의원은 탈당파인 정태근·김성식 의원 등과 세를 규합해 한나라당에서 30명(무소속 2명 포함)의 서명을 받았고, 이 의원은 민주당 의원 22명의 서명을 받아 12월 30일 수정안을 본회의에 제출했다.

 12월 31일 박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로 진행된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정두언·진성호 의원 등은 “부자증세는 세수 증대가 목적이라기보단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다. 총선을 앞두고 우리가 수정안을 부결시키면 ‘부자정당’이라는 낙인이 찍혀 치명적 이슈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최경환·김광림 의원 등은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의총에선 이 반대론이 소수로 밀렸다. 박근혜계로 분류되는 박종근·손범규 의원 등도 최고세율 구간 신설에 찬성 발언을 했다고 한다.

 결국 의총의 분위기가 수정안 쪽으로 확 쏠리자 황우여 원내대표가 나서 최고세율 과표기준을 2억원에서 3억원으로 올리는 중재안을 내놨고, 이 안이 당론으로 확정돼 본회의에서 표결로 통과됐다. 박 위원장은 이 수정안 표결엔 참석하지 않았다. 자신의 뜻과 달리 당론이 결정된 데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는 관측이 나왔다. 이에 대해 수도권의 한 재선 의원은 “민주적 지도자는 자기의 뜻만 내세울 게 아니라 아래의 민심을 살펴야 한다”며 “박 위원장이 보수적 성향의 일부 측근의 말만 듣다가 부자증세에 대해 오판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위원장과 쇄신파는 그동안 협력관계였으나 이번에 파열음을 냈다. 이로써 앞으로 쇄신파가 비대위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가능성도 생긴 셈이다.

 기획재정부는 수정안 통과에 따라 올해 세수가 7700억원가량 늘 것으로 추산했다. 재정부 고위관계자는 “ 담당 소위와 상임위에서 모두 합의 처리된 안건을 본회의에서 뒤집은 것은 ‘상도의’에 어긋난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한편 정부는 휴일인 1일 오전 김황식 국무총리 주재로 새해 첫 국무회의를 열어 개정안을 의결·공포했다. 김 총리는 “소득세법 시행 지연으로 국민이 겪게 될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시급히 국무회의를 개최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정하·허진 기자

◆한나라당 쇄신파=당내에서 개혁 성향의 소장파 의원들을 통칭하는 말. 중진 의원으로는 남경필·원희룡·정두언 의원 등이 있다. 초선 의원 모임인 민본21은 당내 쇄신파 중심 그룹으로 떠올랐다. 재창당을 주장하며 탈당한 김성식·정태근 의원도 민본21에서 활동했다. 비대위원인 김세연·주광덕 의원과 당 대변인 황영철 의원도 민본21 소속이면서 쇄신파로 분류된다.

‘부자증세 반란’ … 한나라당 무슨 일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