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이런 ‘꼰대’를 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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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심상복
경제연구소장 겸 논설위원

고흥·정선·안면도·거제·고창·청송·해남·봉화·보령·고성·순창·보은·영양·양구·울주·신안·서귀포 동부·거창·영월. 모두 스무 곳인데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다들 촌인데 보통 촌이 아니다. 사방 100㎞ 안에 종합병원이 없는 시골이다. 원로의사 10여 명이 2003년부터 이런 마을을 돌며 의료봉사를 펼치고 있다. 이춘용 한양대 병원장, 김세철 관동대 명지병원장, 권성원 차병원 교수, 송재만 연세대 원주기독병원장, 김영곤 전북대 병원장 등 쟁쟁하다. 한 해 두세 곳을 돌며 지금까지 스무 번에 걸쳐 시골 노인 8278명의 고민과 고통을 덜어줬다. 진료과목은 비뇨기과. 종합병원급 진료장비를 동원해 나이 든 남성이면 누구나 겪는다는 전립선 질병을 돌봐준다. 

 지난 10월 28일 강원도 영월 진료 때 마침 동행할 수 있었다. 이날은 좀 더 특별했다. 행사를 후원해 온 국내 로타리클럽 회원 외에 일본과 대만에서 날아온 회원들도 함께했다. 무료진료를 위해 국내에서 얼마를 모금하면 해외에서도 같은 금액을 보태는 매칭펀드로 치러진 행사였다. 참석한 한 일본 기업인은 “아무 조건 없이 헌신적으로 봉사활동에 나서는 한국 의사들의 정성에 탄복했다”고 말했다. 일본 의사들은 권위주의적이어서 이런 일은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늦가을 저녁, 기분 좋게 싸늘한 강원도 맑은 공기를 마시며 우의를 다지는 행사는 꽤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술도 몇 순배 돌았지만 토요일 오전 7시부터 시작된 진료에 늦은 의사는 하나도 없었다. 감히 늦을 수가 없었다. 영월군 보건소를 통해 진료를 예약한 이들이 600명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점심은 순번을 정해 간단히 때우며 강행군했다. 의사 남편들이 환자를 볼 때 부인들은 노인복지 시설과 장애인 시설을 방문해 긴요한 물품을 전달하고 식사 수발을 도왔다. 소리 소문 없이 이런 봉사를 해온 지 벌써 8년이 됐다. 요즘은 남편보다 부인들이 가자고 더 조른다고 한다. 봉사의 참맛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요즘은 ‘꼰대’ 찾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게 온통 부정적 이미지였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 말 속엔 아쉬움이 깔려 있다. 그들은 나이가 든 만큼 생각은 보수적이었지만 어른으로서의 역할은 포기하지 않았다. 할 말을 했고, 행동은 스스로 모범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가 방향성을 잃을 때 나설 줄도 알았다. 그런 점에서 값진 행동으로 말을 대신하는 원로의사들도 이 시대의 몇 안 되는 꼰대들이다.  

 그런데 이런 좋은 일에 난데없는 장애물이 나타났다. 정부가 제약업계 리베이트를 엄격히 규제하면서다. 이들은 지금껏 필요한 약품을 제약회사로부터 협찬받았다. 가난한 시골 노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이니 어렵지 않았다. 외국계 제약사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한 번 진료 때 몇백 명의 환자를 보기 때문에 3000만~4000만원의 비용이 든다. 하지만 보건복지부가 리베이트를 단속하면서 제약업계 지원이 아주 빡빡해졌다. 봉사활동을 이끌고 있는 강남 차병원 권성원(72·한국전립선관리협회 회장) 박사는 요즘 동료 의사들을 달래는 데 진땀을 뺀다. 60대 ‘젊은’ 의사들이 “리베이트 의심까지 받으며 우리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느냐”고 대들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의 기계적인 일 처리가 꼰대들을 화나게 하고 있다.

심상복 경제연구소장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