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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남긴 뜻밖의'유산'에 김정은 '날벼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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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3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된 평양 금수산기념궁전 입구에 경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조선중앙방송은 이날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당과 국가, 무력기관 책임 일꾼과 함께 장군님의 영구를 돌아보셨다”고 보도했다. 김정은은 지난 20일에도 시신을 참배했다. [조선중앙TV=연합뉴스]

북한 새 권력자 김정은이 뜻밖의 유산을 받을 듯하다.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이 남긴 것이다. 서방에 지고 있는 빚이다. 미래 어느 날 김정은 앞으로 빚쟁이들의 내용증명이 날아들 수도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과 로이터 통신은 “원금은 6억8000만 독일마르크와 4억5500만 스위스프랑”이라며 “요즘 미국 달러로 환산하면 9억4100만 달러(약 1조800억원) 정도 된다”고 2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그 빚은 채권 형태로 사고팔린다. 김일성 지시로 서방은행에서 빌렸으니 사실상 ‘국채’다. WSJ는 “북한 ‘국채’ 시세는 원금의 14~18% 수준”이라고 전했다. 국채치곤 헐값이다. 북한이 20년 넘게 이자 한 푼 내지 않아서다. 국채값은 북한 사정에 따라 오르내린다.

 누가 사서 보유하고 있을까? 화폐나 유가증권 수집가들은 아니다. 어엿한 펀드들이다. 최대 보유자는 미국 자산운용사인 프랭클린템플턴이 운용하는 신흥시장채권펀드다. 이 펀드는 전체 원금의 45% 이상인 4억2500만 달러어치를 쥐고 있다.

 그 펀드들은 내심 대박을 기대하고 있다. 미래 어느 날 김정은이 통 크게 원금의 절반만 줘도 감지덕지다. 너무 헐값에 사들여 그 정도만 해도 수익률이 100% 이상이다. 김정은이 원금을 다 갚는다면 펀드매니저들의 입에서 “대장 동지 만세!” 소리라도 나올지 모른다.

 김정은은 북한 국채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뤄진 돈거래다. 할아버지 김일성은 1970년대 후반 서방 은행들의 문을 두드렸다. 그 시절 서방은행은 오일머니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쟁적으로 남미·동유럽 국가들에 돈을 빌려줬다.

 마침 첨단 금융기법 하나가 대유행일 때였다. 신디케이트론이다. 여러 은행이 갹출해 공동으로 빌려주는 돈이다. 북한 대출엔 100여 개 은행이 달려들었다. 은행 한 곳이 댈 돈은 많지 않았다. 은행들의 긴장감이 이완됐다. 돈 빌리는 쪽의 신용도를 꼼꼼히 따지지 않았다.

 북한은 84년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했다. 김정은이 태어난 해이고 남미 외채위기가 한창일 때다. 하룻밤 사이에 수십, 수백억 달러가 떼이는 판이었다. 서방은 북한의 10억 달러 정도 부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당시 채권 은행들은 상환 요구를 강하게 하지도 않았다. 형식적으로 독촉을 한 뒤 ‘받을 권리’를 헐값에 팔아넘겼다. 이후 손바뀜이 이어졌다. 그런데 또 하나의 첨단 금융기법이 적용됐다. 바로 유동화다. 프랑스 간판 은행인 BNP파리바가 94년 북한 국채를 상환받을 권리를 묶어 증권으로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다. 두 가지 첨단 금융기법 덕분에 북한 국채가 사고팔릴 수 있게 된 셈이다.

 로이터 통신은 “유동화 덕분에 펀드들이 북한 채권을 이전보다 손쉽게 사고판다”며 “투자자가 증권사에 북한 국채를 주문하면 유럽 금융정산·결제회사인 유로클리어를 통해 매매가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북한 디폴트 27년 동안 국채엔 이자에 이자가 붙었다. “밀린 이자는 27억~54억 달러 정도”라고 WSJ는 보도했다. 배보다 배꼽이 커진 셈이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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