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현정은 조문 승부수 … 김정일과 ‘격년의 법칙’ 통할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2009년 묘향산 별장 면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왼쪽)이 2009년 8월 1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별장인 묘향산 특각에서 김 위원장과 면담한 뒤 기념촬영을 했다. [중앙포토]

‘격년(隔年)의 법칙’은 이번에도 통할까. 현정은(56) 현대그룹 회장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조문을 위해 방북하기로 한 것과 관련, 홀수 해에 던져진 현 회장의 ‘승부수’가 올해도 위력을 발휘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 회장은 2005, 2007, 2009년 모두 세 차례 김 위원장과 독대했고 그때마다 대북사업의 중요한 물꼬를 텄다.

2005년과 2007년 백두산과 내금강 비로봉 관광을 잇따라 성사시켰고, 2009년엔 금강산 관광 재개와 이산가족 상봉 등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후 얼어붙은 남북 관계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중단된 현대 측의 대북사업도 제자리걸음이었다. 하지만 운명처럼 ‘격년의 법칙’은 작동했다. 또다시 돌아온 홀수 해, 그것도 올해가 채 10여 일밖에 남지 않은 현시점에서 불거진 돌발변수가 현 회장을 다시금 북한으로 이끌고 있다.

 현재로선 현 회장의 방북이 성사될 가능성이 크다. 류우익 통일부 장관은 21일 “첩보 수준의 정보에 따르면 (북한이) 한국과 중국에서 오는 조문단은 받겠다는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이날 서울 연지동 현대그룹 사옥 로비엔 오전부터 취재진이 몰렸다. 그러나 현 회장을 만날 수 없었다. 현 회장이 평소 다니던 1층 출입구가 아닌 지하 주차장을 통해 12층 사무실로 직행했기 때문이다. 현 회장은 이처럼 방북을 앞두고 신중한 행보를 보이며 조용히 방북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조문을 결정하는 과정은 신속하고 강단 있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전적으로 회장님의 결정이며 그것이 바로 현 회장의 뚝심”이라고 말했다. 현 회장은 김 위원장의 사망이 알려진 19일엔 침묵했지만 이튿날 재계 인사 중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애도를 표하고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 예의를 갖추겠다”고 했다. ‘최대한 예의’를 두고 해석이 분분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의미가 분명해졌다. 통일부가 현 회장의 방북 조문을 허용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정부의 공식 입장이나 조의 표시보다 먼저 나온 현 회장의 방북 의지를 정부가 뒷받침하는 모양새였다.

현대그룹이나 현대아산 측은 현 회장의 조문이 대북사업의 새로운 물꼬를 트는 ‘승부수’로 인식되는 데 대해 조심스러워한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이번 방북은 김 위원장의 조문을 위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현 회장 개인으로나 그룹 모두 이번 조문으로 3년가량 중단돼 온 대북사업이 전환점을 맞게 되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현 회장은 전날 일부 언론과 만나 “어른(시아버지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과의 오랜 인연을 생각해도 그렇고 가 보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 사망이 대북사업에 미칠 파장에 대해선 “변화가 있을 것”이라며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지만 금강산 관광 등 대북사업이 다시 잘되길 기대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의 희망이 이번 방북에서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지금껏 현 회장의 ‘승부수’를 받는 역할을 해 온 김 위원장이 고인이 된 마당에 현대가 누구와 교섭할지조차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방북에서 조문 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란 회의론도 존재한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의 한 관계자는 “김 위원장이란 대화 창구가 사라지긴 했지만 조문을 통해 또 다른 창구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고, 그러길 바란다”며 “지금껏 교류조차 못하던 것에 비하면 역설적으로 김 위원장의 사망이 교류를 재개하게 만들어 준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북한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현 회장의 뚝심이 대단하다. 이번 조문이 과거 김 위원장과의 독대 때처럼 현 회장의 ‘승부수’로 성공하게 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이가영 기자

현정은 - 김정일 면담 일지

2005. 7. 16 금강산 통해 원산에서 면담 - 백두산·개성 관광 사업 및 현대아산의 독점권 합의
2007. 11. 2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면담 - 개성관광, 백두산 관광, 비로봉 관광 실시 합의
2009. 8. 16 묘향산에서 면담 - 금강산 관광 재개 및 이산가족 상봉 등 5개 항 합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