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주변 4강 개입 가능성 경계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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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급서(急逝)로 한반도 정세가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한반도만 아니라 동북아 정세에도 큰 파장이 예상된다. 주변 4강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사태 전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일·중·러 등 주변국들은 한국과 공조해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갑작스러운 권력 공백으로 인한 북한 정세의 불확실성이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김 위원장의 사망은 북한 체제의 중대한 분수령이다. 김정은 후계 체제로의 전환이 순조롭게 이루어질지 현재로선 예단하기 이르다. 권력 투쟁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내부 결속을 위한 의도적 도발이나 우발적 도발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내부 혼란이 극심한 경제난과 맞물려 북한 체제가 급속히 와해되는 시나리오도 가능하다. 사태를 예의주시하며 모든 가능성에 대비할 수밖에 없다. 주변국들은 한국 정부와 협력해 북한 정세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만반의 대비 태세를 갖춰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미국과 중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미국으로선 김 위원장의 사망을 ‘앓던 이’를 뽑는 기회로 활용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릴 수 있다고 본다. 더구나 미국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있다. 재선을 노리고 있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서 김 위원장의 사망은 새로운 외교적 변수가 틀림없다. 그러나 상황 판단을 잘못하거나 상황 관리에 실수를 범할 경우 정치적으로 치명적 부담이 될 수도 있다.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한국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해 현명하고 신중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중국은 북한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성급한 기대나 희망적 사고에 기반해 사태를 악화시키는 일이 없도록 자제력을 발휘하기 바란다. 개별적 이해나 편견을 배제하고, 국제법과 국제 규범에 따른 차분하고 성숙한 대응을 촉구한다. 만일 김 위원장 사망을 영향력 확대의 기회로 보고 섣불리 개입할 경우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누구보다 한반도의 7500만 주민이 용납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한민족의 뜻을 거슬러 일방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끌고 가려는 일체의 발상이나 시도를 단호히 배격한다.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는 남북한이다.

 김 위원장은 북한 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했다. 식량 지원과 우라늄 농축프로그램(UEP) 가동 중단을 맞바꾸는 방식의 새로운 합의를 둘러싸고 미·북 간 베이징 접촉이 예정돼 있는 상황이었다. 당분간 접촉을 재개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지만 대화의 모멘텀은 계속 살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에도 미·북은 양자회담을 이어가 결국 제네바 기본합의를 이끌어낸 전례가 있다. 김 위원장의 사망을 북한 핵 문제 해결과 북한을 개방·개혁으로 이끄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국제사회는 한국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한국과 주변 4강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김 위원장 사망은 한반도 문제 해결과 동북아 평화와 안정의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새로운 시련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