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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 빨리 좀 쓰고 싶은 돈들이 있다. 정부 예산은 보통 세금이 걷히는 상황에 따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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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호 31면

새해가 되면 빨리 좀 쓰고 싶은 돈들이 있다. 정부 예산은 보통 세금이 걷히는 상황에 따라 분기별로 나눠 집행하지만 일부 사업 예산들은 해가 바뀌자마자 바로 좀 쓰고 싶다. 예산을 절감하고 집행 효율을 꼼꼼히 따지는 것도 재정당국의 중요한 임무지만 이러한 사업예산들은 정말 빨리 쓰고 싶다. 그것도 아주 화끈하게 쓰고 싶다.

대부분의 국민은 예산이 국회에서 통과되면 바로 돈을 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산이 확정된 뒤 각종 절차와 자금 배정을 하는데 통상 3주 정도가 걸린다. 집행기관으로 가면서 공고, 계약 등에 시간이 더 걸리기도 한다. 바로 준비해도 1월 중·하순까지는 돈을 쓰기 어렵다. 그래서 12월 초부터 따로 준비한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예산안이 통과된 뒤 ‘회계연도 개시 전 배정’이란 제도를 통해 집행을 위한 모든 절차를 12월에 밟아 놓으면 해가 바뀌자마자 바로 돈을 쓸 수 있게 된다.

가장 빨리 쓰고 싶은 돈은 일자리사업 예산이다. 내년도 예산안에서 일자리 창출은 단순히 예산을 늘리는 차원을 넘어 실제로 현장에서 작동되는 모델을 만들려 했다. 특히 창업하려는 청년들이 실제로 어떤 애로를 겪는지 궁금했다. 자금 문제인지, 인력 문제인지, 아니면 창업 실패 후 신용불량자가 되는 문제인지. 답을 찾기 위해 창업센터 등 현장도 가보았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창업에 성공하거나 실패한 사람들부터 창업하려는 대학생들, 그런 학생을 지도하는 대학교수들, 금융기관과 공공기관 임직원들에 이르기까지.

그 결과 예산을 대폭 늘렸을 뿐만 아니라 지원체계를 수요자 중심으로 전면 개편했다. 창업하려는 청년들이 지원프로그램을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했고, 공공기관과 민간 금융회사가 함께 자금과 컨설팅을 제공하도록 했다. 실패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채무의 일부를 조정해 주는 제도도 도입했다. 이러한 청년창업 지원 예산은 1년분을 1분기에 다 소진해도 좋을 것 같다. 일자리뿐 아니라 내년에 대폭 확대한 대학생 국가장학금사업이나 근로 무능력자를 대상에 추가한 기초생활보장사업 같은 것도 연초부터 바로 써야 할 예산들이다.

정부 예산안은 지난 9월 30일 국회에 제출되었다. 연초 국가재정운용계획 수립부터 구체적인 사업 검토까지 9개월 동안 힘들게 작업한 것이다. 특히 올해는 고심한 주제가 많았다. 건전재정으로 가는 것이 맞는지, 일자리 예산을 더 늘릴 필요는 없는지, 복지는 왜 맞춤형으로 해야 하는지, SOC 예산의 적정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이런 주제들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국회에서 늦어지고 있는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다.

최근 9년 동안 예산안은 법정기한 내에 통과된 적이 한 번도 없다. 심하게는 12월 31일 통과된 적도 있다. 예산안 자체가 문제가 되거나 내용을 꼼꼼히 따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대부분 정치적인 이유에서다. 안타깝게도 같은 상황이 올해에도 전개되고 있다.

예산 확정이 늦어져 그만큼 집행에 차질을 빚게 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어려운 서민이나 취약계층, 일자리를 구하는 청년, 장학금을 받으려는 학생들이다. 이들은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내기 어려운 계층의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기초생활보장의 경우 매월 15일까지 자금배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법정 급여기일인 20일 지급이 어려워질 수 있다. 정부지원금에 의존하는 155만 명의 기초생보자에게 그 피해가 갈 수 있다. 의사결정을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중앙정부의 예산 확정이 늦어지면 지방정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은 법에 따라 12월 중순까지 확정하도록 돼 있으나 중앙정부에서 갈 예산이 정해지지 않으면 지연될 수밖에 없다. 특히 중앙과 지방정부 간에 매칭 방식으로 시행되는 많은 사업은 몇 개월씩 집행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중앙이 지방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경제가 어렵다. 최근 내년 경제성장률을 하향 조정했고, 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는 어디까지 번져갈지 모르는 상황이다. 특히 내년 상반기가 앞으로 경제상황을 가름하는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더욱 내년 예산안이 하루 빨리 확정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경제에 도움을 주고 국민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면 좋겠다. 그런 예산 제발 좀 빨리 쓰고 싶다.



김동연 대통령실 경제금융비서관으로 2008년 경제위기 극복에 기여했다. 미시간대 정책학 석·박사.덕수상고 졸업 후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1982년 행정·입법 고시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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