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 때 소 지킨 여고생, 이젠 수의사를 꿈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건대 수의학과에 합격한 이현주양이 14일 축사에서 송아지를 보살피고 있다. [연합뉴스]

“구제역으로 죽어가는 송아지를 살리지 못해 마음이 아팠어요. 수의사나 전문검역관이 돼 동물전염병 백신을 개발해 우리 소를 지켜 내고 싶어요.”

 올해 초 구제역이 확산됐을 때 학교에도 못가고 아버지와 함께 방역 작업을 하면서 수의사의 꿈을 키워온 농촌 여고생이 수시모집 입학사정관 전형으로 건국대 수의학과에 합격했다.

요즘도 소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홍천여고 이현주(18·3년)양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소와 처음 친해졌다. 축산업을 하는 아버지 이봉영(52)씨를 도우면서 자연스럽게 소와 가까워진 것이다.

여물을 주는 일을 돕던 이양은 고교에 진학한 후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축사를 청소하고 왕겨를 뿌려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냄새 나는 소똥을 치우는 일은 고역이었지만 고생하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참아냈다.

 초등학교 때는 의사를, 이후에는 간호사를 꿈꿨던 이양은 올해 초 구제역을 겪으면서 진로를 바꿨다. 구제역이 마을을 휩쓸자 집에서 기르던 90여 마리의 소를 지키기 위해 학교의 보충수업에도 가지 못했다. 소독약이 잘 풀어지도록 더운 물을 나르거나, 통에 담긴 소독액의 수위를 살피는 일은 이양의 몫이었다. 강추위로 언 송아지를 거실로 데려와 난방기구를 틀어 주는 등 정성을 기울였다.

 이렇게 아버지를 도와 구제역을 큰 피해 없이 이겨낸 이양은 수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이양은 생물수업 시간에 돼지와 닭의 심장 해부를 자청하는 등 열의를 보였다. 성적은 2등급 초반으로 목표한 대학의 수의학과 진학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양은 소 우리 치우기, 송아지 돌보기, 생물시간 심장 해부 등 자신의 경험과 수의사가 되겠다는 의지를 잘 설명해 입학사정관 전형에서 합격할 수 있었다. 건국대 입학사정관실은 “이양은 꾸며진 포트폴리오가 아니라 자신의 순수한 내면이 드러나는 순박함과 동물을 사랑하는 진심이 돋보였다”고 합격 이유를 밝혔다.

 이양은 “아버지께서 축산업을 하시지 않았더라면 동물에 대한 애정을 키워갈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며 “송아지의 잉태와 출산을 지켜보며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찬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