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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밸리에 벤처 강풍 휘몰아친다!

중앙일보

입력

우수한 기술을 보유하고는 있지만 서울의 테헤란밸리에 눌려 잊혀졌던 대덕밸리. 그곳이 요즘 거대한 용트림을 시작하고 있다. 테헤란밸리의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개념의 벤처 밸리로 자리매김하려는 이 지역 사람들이 발빠른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2년 내 50여 기업 코스닥 등록 예상

지난 19일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가 열리고 있는 한국과학기술원 내 벤처 카페 ‘대덕 아고라’.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선임 연구원과 일단의 벤처 기업인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미국 AT&T와 IBM 출신의 재미교포가 주축이 돼 금명간 설립될 기업의 사업설명회 자리.

‘STREAM2GO’란 이름의 이 회사 관계자는 공식 출범에 앞서 기술 제휴를 검토하기 위해 미국에서 대전으로 날아왔다. 이 자리에서는 거꾸로 대덕밸리 내 기업의 해외 마케팅 대행 문제도 심도 있게 논의됐다.

연구소에서 파생된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한 대덕밸리의 가능성과 약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기술력은 미국에서도 알아줄 만큼 뛰어나지만 이를 상품화시키고 판매하는데는 서투른 게 현실이다.

신설사의 이사인 제이 엄씨는 “매우 유익한 자리였다”며 “앞으로 대덕밸리와 잦은 왕래가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대덕밸리가 한국의 벤처 심장부로 떠오르며 주목받고 있다. 닷컴 중심의 서울 테헤란밸리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제조업 중심 벤처들로 이뤄져 코스닥 게걸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는 벤처 강풍이 불고 있는 것이다. 강풍의 예는 아이티라는 기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기업에서도 만들지 못하는 80Gbps급 대용량 광전송 장비를 만드는 아이티(대표 공비호). 5년 전 설립해 그 동안은 제품 개발에만 힘을 쏟았다. IMF 체제 하에서도 연구에만 몰두한 결과 점차 매출액이 늘었다. 특히 올해는 지난 해 78억원에 머물렀던 매출이 3백50억원으로 비약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직원 수도 올해 초 12명에서 6월에는 40명으로 늘었고 연말까지는 50여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아이티의 기술진은 화려하다. 공사장은 22년간 광전송 장비 외길을 걸어온 국내의 대표적인 광기술 분야 전문가다. 지난 78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 입사하면서부터 광송수신기 개발에 착수, 삼성전자를 거쳐 95년 아이티를 설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설연구소 소장인 고정훈 박사는 10Gbps급 광전송장치를 개발하는 등 ETRI에서 16년간 광통신만 연구해 왔다. 통신망 관리 시스템 소프트웨어 전문인 송주빈 박사와 나기운 박사 등도 아이티가 자랑하는 보물들이다.

현재 대덕밸리의 4백여개 기업 중 코스닥 등록기업은 2개사. 그러나 숫자가 적은 만큼 앞으로 최소 50여개 기업은 2년 내 코스닥에 등록할 것으로 예측된다.

올해 들어 분위기 일변

대덕의 벤처 강풍은 대전 지역 전체에 벤처 열기가 조성되면서 일기 시작했다.

13개 정부 출연 연구소와 50여개 민간연구소 등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연구단지인 대덕은 사실 국내에서 실리콘밸리처럼 벤처들이 태동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서울의 테헤란밸리에서 열풍이 휘몰아칠때 이쪽은 무풍지대였다. 일부 벤처인들은 자금을 모으려 해도, 인력을 서울에서 스카우트하려 해도 지방이란 한계가 작용함에 따라 일정단계에 다다르면 서울로 옮겼고 이에 따라 남은 사람들은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올해 들어 분위기가 일변했다.

변화의 동인은 지역 주민들이 제공했다. 대전과 대덕연구단지는 외지인들에게는 하나로 비춰지지만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한 지붕 두 가족’이었다. 토박이들은 “외지에서 내려와 잘난 체한다”며 연구단지 사람들을 못본 체했고 연구단지 사람들은 “텃세를 부린다”고 지역민들을 외면했다. 반목의 결과는 두 쪽 모두의 손해였다.

터보테크·새롬기술·핸디소프트 등 대표적 벤처기업들이 대전에서 태동했으나 결실은 서울에서 맺었다. 연구단지 사람들은 창업한 뒤 돈줄과 판로를 찾아 낯선 서울을 찾아야 했고, 지역주민들은 돈을 벌 기회를 잃어버린 것.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라 할 수 있는 40대 중반의 사내들이 보다못해 올 봄 연구단지와의 화해를 자청했다. 십시일반으로 호주머니 돈을 갹출해 벤처 카페를 차렸다. 지역민들과 벤처인 및 연구원들 간의 만남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이름도 그리스 시대 시민들의 자유토론 광장이었던 ‘아고라’에 착안해 ‘대덕 아고라’로 지었다.

주민들이 움직이자 연구단지와 벤처기업인들도 호응했다.

대덕연구단지 연구소장들의 모임인 대덕연구단지 기관장협의회 회장인 정선종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은 창업보육센터 내 휴게 공간을 카페 장소로 제공했다. 일부에서 특혜라고 시비를 걸기도 했으나 “지역민들과 연구단지 화해의 상징적 장소”라며 지원을 결정했다.

벤처기업인들도 움직였다. 이전까지 대전지역의 대표적 벤처기업 모임은 ‘대덕 21세기’. 연구원 출신의 벤처 창업자들로 이뤄졌다. 창립 초기에는 대표성을 갖고 활동할 수 있었으나 점차 비연구원 출신의 창업도 늘고 연구원 출신도 가입하지 않으면서 침체 상태에 있었다. 뜻있는 벤처기업인들이 연구원 출신이란 제약을 없애고 벤처기업인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1시간대 생활권인 천안·아산 등 충남권과 청원·청주 등 충북권 벤처기업들도 함께 하기로 했다.

새롭게 결성된 모임은 ‘21세기 벤처 플라자’. 대덕밸리의 가능성을 알아본 삼성전자에서 소요 경비를 댔고 지역 내 3백여 기업이 참가한 가운데 지난 5월31일 성대하게 발족했다. 대전 지역의 벤처 기업들은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이다.

9월 말에 열리는 벤처 국방 마트가 그것. 대전은 일반인들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군사도시다. 3군본부가 위치한 계룡대가 차로 20분 거리에 있고, 병참 역할을 하는 자운대는 시 행정구역 내에 있다. 군사도시로서의 특성을 살려 대덕밸리의 기술력과 국방을 접목시키자는 것이 국방 마트 개최의 의의이다.

벤처 기업들의 군수시장 개척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가 인터시스와 공군의 업무협조. 인터시스는 인공위성에서 송신한 자료를 3차원 영상으로 구현해주는 기술을 가졌다. 인터시스의 VIP란 제품은 마치 비행기를 타고 현지를 둘러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며 도로 건설과 도시 계획 등에 유용한 소프트웨어다. 우연한 기회에 공군 장성의 눈에 띄어 바로 공군과 업무협조가 맺어졌다. 벤처 국방 마트는 자치단체와 벤처기업·대전 무역전시관 등이 수평적 업무협조로 이뤄내는 새로운 사례이나 아직 국방부의 협조는 미온적이다.

장밋빛 전망은 위험

하지만 대전에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일부 연구소는 연구 인력의 상당수가 창업함에 따라 기능이 마비됐다는 말을 들을 정도다. 연구원들의 ‘묻지마 창업’은 여러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연구소가 계속 기반 기술을 제공해줘야 벤처 기업들의 존립이 가능한데 신기술 공급이 끊기면 기업들의 지속성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연구와 사업화는 천양지차가 있음에도 연구원들이 이러한 차이를 간과하고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제품의 상품화에는 양산 기술 및 인접 기술과의 연계가 필요하고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아이템으로 위험을 분산시킬 필요성이 있으나 대개 한두 개의 강점을 가진데 불과해 모험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지방에 있다는 점도 한계로 작용한다. 자금 모집이 어렵고 판매는 더욱 힘들다. 1백30여개 창업투자사 가운데 대전에 본점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기술력은 있지만 경영·마케팅에 취약한 만큼 이를 창업투자사 등을 통해 해결해야 하나 이들이 대부분 서울에 근거를 두고 대전은 출장지여서 속깊은 만남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인력 유치에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KAIST 신기술창업지원단 내의 한 기업은 제주도에서 출발해 서울-대전-서울-실리콘 밸리의 경로를 밟고 있다. 대전은 기술력은 있지만 시장과 인력이 없어 연구 기능만 놓아두고 서울로 올라가겠다는 것.

김종득 한국과학기술원 신기술창업지원단장은 “비전이 현실로 바뀌기 위해서는 지역사회·벤처기업·연구소의 유기적 협조가 필수불가결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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