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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 - 정재승이 만난 사람들] (10) ·끝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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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를 말하면서 ‘관계’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연이 있겠다는 태도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갈등과 대립의 시대, 한국 사회를 여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카이스트 정재승(39) 교수가 지난 5월 23일부터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인문학자를 찾아 나섰던 ‘희망의 인문학-정재승이 만난 사람들’이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그 마지막 회로 신영복(70) 성공회대 석좌교수를 초대했다. 인간에 따뜻한 시선과 깊은 성찰로 수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냈던 그다.

지난달 23일 이화여대 삼성교육문화관에서 열린 특별 공개대담(진행 유정아 아나운서)에는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2011 고단했던 한 해를 정리하는 의미도 있었다.

 ▶정재승=대표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어디선가 ‘청춘은 감옥이었다’고 쓰셨는데요, 요즘 젊은이들 보시면 어떤가요.

 ▶신영복=지금 청년들도 감옥에 있는 것 같아요. 청년실업 등 지금 시대에 겪는 고통, 보이지 않는 감옥 같은 생활이죠.

 ▶정=감옥 20년을 ‘나의 대학생활’이라고도 하셨는데요.

 ▶신=막심 고리키의 『나의 대학』이라는 책이 있어요. 고리키의 학력은 초등 3학년이 전부죠. 볼가강의 뱃사공 일을 도왔는데, 볼가강 근처 노동자합숙소에서 지낸 2~3년 간의 시절을 ‘나의 대학시절’이라고 해요. 내가 보낸 20여 년도 비슷한 것 같아요. 비록 갇혀 지냈지만, 밖에 있었다면 절대로 만나지 못했을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정=20년을 감옥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신=교도소에도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요. 제가 무기징역 받고 추운 독방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왜 자살하지 않나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어요. 저는 햇빛 때문에 죽지 않았어요. 그때 있었던 방이 북서향인데, 하루 두 시간쯤 햇빛이 들어와요. 가장 햇빛이 클 때가 신문지 펼친 크기 정도고요. 햇빛을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 있을 때 정말 행복했어요. 내일 햇빛을 기다리고 싶어 죽지 않았어요.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결코 손해는 아니다, 그런 생각을 했죠. 그 다음에는 내가 자살하면 굉장히 슬퍼할 사람들이 있었어요. 부모, 형제, 친구…. 존재라는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유정아=어떤 사람에게 큰 슬픔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신=그렇습니다. 우리 존재와 삶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닐까요. 저도 근대적 교육을 받았기에 사고 방식도 근대적이었죠. 같은 무기수이면서도 다른 재소자를 볼 때 거리를 두고 분석을 했어요. 겉으로는 친절했지만 죄명·형기·출신·학력 이런 걸로 수감자를 대상화하는 거죠. 나중에 알았지만, 제가 5년 간은 왕따였어요. 인간적 관계를 만들지 못한 거죠. 그 후 그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를 들을 줄 알게 되고, 또 공감하게 됐습니다. 그때 왕따를 면한 것 같습니다. (웃음)

 ▶정=공감이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신=그것만으로는 진정한 인간관계가 형성되지 않아요. 공감, 흔히 ‘머리에서 가슴까지 왔다’고 하는 공감은 근대적 사고의 산물이죠. 책에도 썼지만, 목공장에서 일을 배울 때 보니까, 목수가 집을 그릴 때 주춧돌부터 그리고 지붕을 마지막에 그렸어요. 충격적이었죠. 보통 사람은 집을 그릴 때 지붕부터 그리지 않나요. 책을 통해서 도달한 인식이 얼마나 관념적인가 알게 됐죠. 일하는 사람은 집 짓는 순서와 그리는 순서가 같아요. 또 톨레랑스(관용)란, 당신은 주춧돌부터 그리세요, 난 지붕부터, 우리 평화적으로 공존하자, 이런 거죠. 그러나 이 역시 타인을 역시 밖에 세우는 거죠. 중요한 건 세상의 다양성을 내가 변화할 수 있는 반갑고 고마운 기회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공감과 관용도 근대 패러다임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슴에서 발까지 가야 합니다.

 ▶정=관용이 부족한 사람과 잘 지내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신=뭔가 변화하고 뛰어넘기 위해서는, 적어도 사람을 이해한다고 할 때는 그 사람만이 아닌 그 사람이 살아온 역사와 지금의 처지를 아울러서 이해하는 게 옳습니다. 사람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하죠. 그리고 그 사람의 장점에 대해 고래가 춤출 정도로 칭찬해야 해요. 지금 교육은 모난 부분을 깎아서 결함을 교정시키고, 원만하게 만드는 거죠. 그러면 안됩니다. 그걸 포용할 수 있는 더 큰 원을 만들어, 그 안에 모를 넣어야죠. ‘춘풍추상(春風秋霜)’이라는 말이 있어요.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춘풍처럼 부드럽게 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고요. 대신 나를 생각할 때는 추상같이 엄격하게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반대로 하죠.

 ▶독자 1=감옥이 배움의 자리였다고 하셨는데, 일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런 큰 배움의 자리를 만날 수 있을까요.

 ▶정=모든 사람이 깨달으며 살고 있죠. 저처럼 책을 쓰지 않을 뿐이죠. 결국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6·3 사태 때 제가 써준 원고가 압수돼 울산 해변가에 숨어 있었어요. 한 달간 너무 무료해서 바닷가에서 파도를 봤죠. 자갈이 길게 펼쳐져 있었어요. 모두 동글동글 다듬어져 있었죠. 오래 보고 있으면서 자갈이 다듬어지는 과정을 깨달았어요. 파도가 들었다 내려놓으면 서로 막 부딪혀요. 그걸 수천만 년 했겠죠. 서로 부딪히고 마모되며 아름답게 만들어지는 거죠. 기쁨과 슬픔의 근원은 바로 ‘관계’에요. 적어도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려면 인간적인 만남을 통해 서로 부딪혀야죠.

 ▶독자 2=꿈의 의미가 비틀어진 시대, 젊은층이 깨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생님을 좌파지식인이라고 소개하는 기사를 봤는데요.

 ▶신=좌우, 진보 보수, 이렇게 분석하고 나누는 것도 근대성의 일면입니다. 누가 나한테 ‘경계에 선다’고 해요. 저는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경계는 좌와 우를 나눈다는 전제하에 나오는 말이니까요. 명백하게 구분돼 있는 건 아니죠. 잘못된, 불운한 역사 때문에 좌와 우가 소통하는 게 아니라 ‘소탕’하고 있어요. 사실 좌우라는 것, 극단적으로 나뉘지 않는 거예요. ‘좌’라는 것은 조금 불편하지만 뭔가 현 단계를 새롭게 재구성하고 가치지향을 하자는 거고. ‘우’라는 것은 현재의 모든 생명을 따뜻하게 지키자는 겁니다. 둘 다 좋은 거고, 공존해야 하는 거죠. 이론은 왼쪽, 실천은 오른쪽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자리를 정리하는 한마디를 부탁합니다.

 ▶신=사실 누군가 아는 사람이 누군가 모르는 사람에게 깨쳐주는 구도는 없습니다. 모르는 건, 가르치는 사람이 아무리 얘기해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내가 아는 이야기는 내가 겪은 사진을 보여주는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앨범에서 비슷한 사진을 뽑아서 보시면 됩니다’라고요. 모두 아는 얘기라는 거죠. 서로 갖고 있는 그림을 보며 공감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함께 가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삶의 골목에서 작은 것들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정리=이은주 기자
김민영 프리랜서 작가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신영복 교수의 책·책·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98, 돌베개)=신영복 교수의 옥중서간 모음집. 1976년부터 88년까지 감옥에서 휴지와 엽서 등에 부모·형수·제수 등 가족에게 보냈던 편지를 묶었다. 옥중에서의 생활, 생명과 자연, 그리고 사람과 관계 등에 대한 속 깊은 사색을 시(詩)적인 문장으로 풀어냈다.

◆더불어 숲(2003, 중앙m&b)=중앙일보 지면에 연재했던 기행 에세이를 모았다. 세계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과거와 미래와의 관계를 성찰했다. 서로 존중하며 더불어 살고, 아픔과 기쁨을 나누는 ‘공존과 평화, 그리고 인간’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2004, 돌베개)=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동양고전 강독. 『시경』 『서경』 『초사』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등을 읽으며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를 재조명한다.

◆신영복=1941년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대학원 졸업.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교관으로 복무하던 중 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음. 20년 20일을 복역하고 88년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89년부터 성공회대에서 강의. 98년 사면복권. 성공회대 부교수로 임용. 2006년 성공회대 대학원장으로 정년 퇴임. 현재 성공회대 석좌교수.

알림

※ 신영복·정재승 교수 대담 동영상과 내용 전문을 중앙일보와 예스24가 함께하는 ‘희망의 인문학’ 캠페인 홈페이지(inmun.yes24.com)에서 볼 수 있습니다. QR코드로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소감을 2012년 1월 1일까지 홈페이지에 남겨주시면 추첨해 선정된 분께 도서지원금을 드립니다. 지금까지 ‘희망의 인문학-정재승이 만난 사람들’(총10회)을 사랑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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